추미애에게 인정받은 기자의 엘시티 이야기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오늘(11일) 페이스북에 2017년 검찰의 엘시티 수사에 대한 글을 썼습니다. 검찰이 석동현 전 검사장이 엘시티 실소유주 이영복 회장으로부터 3억 원을 받았다는 진술을 확보하고도 제대로 수사하지 않고 덮었다는 보도를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추 전 장관은 “정의를 덮은 검찰이 수사를 독점할 자격 없다.”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추 전 장관이 글을 올리기 하루 전쯤에 추 장관을 적극 지지해왔던 여러 유사 언론인들도 엘시티와 관련된 비슷한 의혹을 제기하면서 검찰을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들이 말하는 검찰의 석동현 수사 무마 의혹은 제가 2017년 4월에 단독보도한 것입니다. 저와 동료들은 오랫동안 취재한 끝에 추미애 전 장관이 언급한 의혹을 포함해 대략 아래의 4가지 의혹에 대해서 단독보도했습니다.

  1. 엘시티 실소유주 이영복 회장이 석동현 전 검사장에게 3억 원을 줬다는 진술을 했는데도 검찰이 석 전 검사장을 한 차례 소환조차 하지 않고 진술서만 한 번 받은 채 피의자로 입건하지도 않고 내사종결 처리했다는 의혹
  2. 이 과정에서 수사팀이 강제 수사 필요성을 여러 차례 주장했지만 묵살됐다는 의혹
  3. 이영복의 변호사였던 석동현 전 검사장이 수배 중이었던 이영복을 숨겨줬다는 의혹. 이와 관련된 CCTV 화면 보도
  4. 석동현 전 검사장이 분양받은 엘시티 관련 레지던스 계약금 1억 원을 엘시티 측이 내줬다는 의혹
    (이에 대해 석동현 전 검사장은 이영복으로부터 받은 돈은 부정한 돈이 아니라 정당한 자문료였으며, 이영복은 지인의 집에 은닉해준 적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레지던스 계약금에 대해서는 이영복 회장이 분양 흥행을 위해서 계약금을 빌려주겠다고 제안한 것이라면서 나중에 레지던스를 팔아서 이 회장에게 돈을 돌려줬다고 주장했습니다.)

추미애 전 장관은 제가 4년 전에 단독 취재해서 폭로했던 검찰의 수사 관련 의혹을 근거로 검찰을 비판한 것입니다. 어찌보면 저의 기사가 추미애 전 장관에게 인정을 받은 셈입니다. 그런데 이쯤 되면 추미애 전 장관을 많이 좋아하시고, 그동안 저의 글이나 말에 대해 비난해오셨던 어떤 분들은 많이 헷갈리실 것 같습니다.


‘임찬종은 검찰을 비호하는 적폐 기자인데 왜 검찰 수사를, 그것도 특수통 검사의 수사를 비판하는 단독보도를 했을까?’
‘검찰을 개혁하려는 추미애 전 장관 같이 정의로운 분이 임찬종 같은 적폐 기자의 단독보도를 인정하는 것은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데…’라고 느끼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만약 이런 느낌을 받았다면 당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진영논리와 정파성에 물들어 완전히 왜곡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저 뿐만이 아니라 검찰을 담당한 ‘법조 출입 기자’들 중 상당수는 검찰 수사와 관련된 의혹, 검찰의 비위 의혹을 감시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제가 보도한 엘시티 수사 관련 의혹 뿐만이 아니라, 특임검사가 도입된 계기가 된 ‘그랜저검사’ 사건도 SBS 법조팀의 단독취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 ‘검란’의 계기가 된 이른바 ‘김광준 부장검사 스폰서’ 사건 역시 SBS 기자의 단독보도였습니다.

김영란법이 마련되는 계기가 된 ‘벤츠여검사 사건’은 경향신문 법조팀 기자의 단독보도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진경준 검사 사건이나 김형준 검사 스폰서 의혹 등은 한겨레신문 법조팀 기자들이 보도했습니다. 법조기자들과 검찰 사이의 거리감이 지나치게 가깝다는 저널리즘적 비판은 새겨들을 부분이 있지만, 법조기자 대부분이 검찰과 유착해 검찰의 비리를 은폐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식의 주장은 일각의 주장은 사기에 가깝습니다.


그렇다면 그랜저검사, 김광준 검사, 벤츠여검사, 진경준 검사 사건 등을 보도했던 법조기자들이 왜 조국 전 장관 사건 등에 대해서는 검찰 편을 들면서 검찰의 범죄를 은폐하게 바빴다는 평가를 받았을까요? 물론 당시 법조기자 모두가, 검찰의 수사 전부에 대해 긍정적인 보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상당 수의 기사가 조국 전 장관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보도된 이유는 간단합니다. 조국 전 장관과 관련해 취재되는 팩트가 고위공직자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기에 충분할 정도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국정농단 사건 당시 법조기자들이 보도한 기사 대부분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 씨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보도된 것과 같은 이유입니다. 1심 판결을 통해 사실 관계에 대한 당시 기자들의 합리적 의심 대부분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점이 입증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법조기자’라는 집단 전체를 묶어서 어떤 방식으로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입니다. 조선일보 법조기자와 한겨레신문 법조기자의 보도를 한덩어리로 묶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들 눈에는 이상해 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법조기자는 정상적인 보도를 하지만, 어떤 법조기자들은 정말 비윤리적인 보도를 하기도 합니다. 보도 경쟁이 과열되면서 비합리적인 보도도 적지 않게 나온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이 글에서는 법조기자들의 전반적인 보도 방향이 조국 또는 박근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기울어졌던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다시 엘시티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적폐기자’인 임찬종이 엘시티 관련 검찰 수사 관련 의혹을 4년 전에 제기했던 기자라는 것이 거북하게 느껴지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엘시티 관련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선거를 앞두고 이 사건을 정파적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엘시티 사건 관련 검찰 수사의 의혹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나 한동훈 검사장을 엮으려는 시도만 봐도 그렇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저는 4년 전에 검찰이 석동현 전 검사장 관련 사건을 미심쩍게 마무리한 점에 대해 오랫동안 취재해 의혹을 제기했지만, 이 과정에서 윤석열 전 총장이 개입했다는 정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취재했던 사람 중에 윤석열 개입 의혹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고, 당시는 윤석열이 박근혜 정부나 김수남 검찰총장의 대검과 대척점에 서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사에 개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한동훈 전 검사장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윤석열과 한동훈 두 사람은 당시 국정농단 특검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을 수사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고려할 때 아마 부산지검 수사에 개입하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윤석열 전 총장과 석동현 전 검사장이 김수남 당시 검찰총장과 함께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인 것은 맞습니다. 대학 시절부터 이후까지 오랜 기간 친분 관계를 유지한 것도 맞을 것입니다. 석동현 전 검사장을 수사할 당시 부산지검 2차장 검사였던 윤대진 검사장이 윤석열 전 총장과 가까운 사이인 것 역시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하지만 ‘윤석열의 친구를 윤석열의 후배가 수사하는 과정에서 덮었다는 의혹이 있으니 윤석열이 개입했을 수 있다’라는 의혹 제기는 민망할 정도로 논리가 부족한 주장일 것입니다. 물론 요즘 어떤 분들은 이 정도의 논리(?)만 있어도 몇 꼭지씩 기사를 써대기도 하지만… 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게다가 석동현 전 검사장은 이 사건 이후 윤석열 전 총장이 기무사 사건 등을 수사할 때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의 변호인으로 참여했으며,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후에는 윤석열의 서울중앙지검이 강압수사를 했다면서 앞장서서 윤석열을 규탄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약 윤석열의 도움으로 검찰 수사를 무마한 것이었다면 불과 얼마 후 석동현이 윤석열의 대척점에 서서 윤석열을 공개 비난할 수 있었을까요? 저 역시 부산지검의 당시 수사 과정에 의혹이 있다고 판단해 폭로한 것이지만, 엘시티 의혹에 윤석열을 엮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선거를 앞두고 엘시티 사건을 정파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서는 씁쓸하게 느껴지는 점이 또 있습니다. 저는 2017년 4월 엘시티 관련 의혹을 폭로할 때 굉장히 외로운 상황이었습니다. 기사를 통해 여야가 합의했던 엘시티 특검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도 했습니다. 심지어 민주당 쪽 인사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가 있을 때에 제가 보도한 기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여야가 도입하기로 국회에서 합의한 엘시티 특검을 빨리 실시해서 철저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제 이야기를 들은 사람 중에는 이후 현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난 4년 동안 여당도 야당도 엘시티 관련 의혹, 검찰의 엘시티 수사 관련 의혹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선거가 다가오자 진보 성향이라고 자처하는 시민단체가 엘시티 관련 의혹을 폭로하고, 강한 여당 지지 성향의 유사 언론인들이 엘시티 관련 의혹에 대해서 떠들기 시작하고, 강한 여당 성향의 언론사들이 관련 의혹을 보도하고, 심지어 전직 법무부 장관까지 말을 보태기 시작했습니다.


엘시티에 대한 검찰 수사의 의혹을 단독보도했던 사람으로서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제가 4년 전에 정당하게 의혹을 제기한 사건이 정략적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4년 전 저의 보도가 요즘 다시 빛을 보고 있는 상황이 기쁘기보다는 씁쓸합니다.

2021년 3월 11일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 페이스북 글


엘시티 의혹을 단독보도한 이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석동현 전 검사장은 보도 직후 법조기자들에게 ‘허위 보도’라는 취지의 입장문을 돌리면서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다른 언론사가 제 기사를 받아서 보도하는 것을 막으려는 조치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후 석동현 전 검사장은 저와 회사, 그리고 함께 보도한 기자들과 보도국 간부들을 상대로 8억 원이 넘는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검찰 출신인 석동현 전 검사장이 허위로 고소할 경우 무고죄로 처벌받는 형사 고소는 안 했다는 것입니다. (소송에 앞서 언론중재위원회에서는 직권조정 결정이 내려졌는데 보도에 아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저는 변호사를 선임해 소송에 대응했고, 법정에서 제가 취재한 추가적인 내용을 포함해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했습니다. 얼마 후 석동현 전 검사장은 소송을 취하하겠다며 소 취하에 동의해달라고 요구해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법정에서 진실을 가리겠다며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석 전 검사장 측은 계속해서 변호사를 통해 소 취하에 동의해달라고 요구해왔습니다. 소송을 취하하기 위해서는 피고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저는 ‘관련 기사에 대해 앞으로 어떠한 민사상, 형사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라는 취지의 서약서를 석동현 전 검사장 측으로부터 받은 후 소 취하에 동의해줬습니다. 석동현 전 검사장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큰 소리를 쳤지만, 4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 기사가 온라인에 그대로 남아있는 이유입니다.


엘시티 관련 의혹의 진실은 밝혀져야 합니다. 이 사건은 취재하면서도 굉장히 애를 먹었고, 보도 이후에도 앞서 말했듯이 여러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습니다.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은 저 역시 큽니다. 하지만 4년 동안 이 사건을 외면해오다가 갑자기 선거를 앞두고 이 사건을 이용하려는 의도가 뻔히 보이는 여러 시도들은 참으로 눈살을 찌뿌리게 합니다. 석동현 -> 검찰 -> 윤석열 -> 한동훈이라는 식의 막가파식 논리로 윤석열을 엮어서 프레임을 짜 공격하려는 시도 역시 어이가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저 역시 완벽하게 중립적이거나 독립적인 언론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루 하루 제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상식적인 판단을 하고, 가치 있는 보도를 하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니다. 어떤 분들의 생각과는 달리 어떤 경우에는 검찰과 관련된 의혹을 폭로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검찰 수사와 사실 관계를 정략적 의도로 왜곡하는 선동가들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너는 어느 편이냐’라고 묻는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할 말이 없지만, 기자로 일하는 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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