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블랙리스트와 문재인 정부의 ‘뉴 노멀’

2019년 2월, 저와 동료들은 ‘환경부 블랙리스트’에 청와대 가 개입한 의혹을 처음으로 보도했습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환경부 관련 공공기관 임원들의 사표 제출 현황에 대해 환경부가 정리한 문건을 김태우 전 수사관이 공개하면서 시작됐습니다.

이어진 검찰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와 여당이 ‘단순 동향 파악 문건’이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사표 제출을 거부한 임원들에 대한 표적 감사가 진행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사표 강요 과정에 청와대 인사수석실 등이 개입한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환경부가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명시된 공모 절차를 위반하고, 청와대가 낙점한 내정자들을 관련 기관 임원으로 임명하기 위해서 내정자에게 공모 관련 정보를 사전에 알려준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이상은 최근 선고된 1심 판결을 통해 다시 한번 사실로 확인됐습니다.)

환경부의 표적 감사 의혹과 청와대 개입 의혹, 그리고 청와대가 낙점한 인물을 임명하기 위한 공모 절차 방해 의혹 등은 저와 SBS 법조팀 동료들이 처음으로 보도한 기사였습니다. 보도 과정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청와대 인사수석실 개입 의혹을 보도하자 청와대와 여당에서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체크리스트에 불과’하다며 보도가 부당하다고 공격했습니다. 이전 정부에서도 공공기관 임원 임명과 관련해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는데, 이제와서 이를 문제삼는 검찰과 언론사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회사 외부 뿐만 아니라 회사 내부에서도 비슷한 문제를 제기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여러 차례 같은 답변을 반복해야 했습니다. 대략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공공기관 임원의 임면과 관련된 절차는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고, 이를 위반하는 것은 명백한 법률 위반입니다. 따라서 설사 과거에 법률을 위반해 청와대 내정자를 임명하는 관행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정당하다고 옹호하기는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2016년 말부터 줄곧 검찰과 법원을 취재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해온 ‘과거의 잘못된 관행에 대한 형사적 단죄’ 작업을 거의 모두 지켜봤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직 사회의 관행에 대해 들이대는 판단의 기준이 과거에 비해 훨씬 엄격해지는 것을 목격했고, 이를 단죄하는 수단으로 활용된 직권남용죄에 대해서도 많은 기사를 썼습니다.

한 마디로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이후 우리 사회의 관행에 대한 새로운 기준, ‘뉴 노멀(New normal)’이 성립된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표현대로라면 ‘재조산하’가 된 것입니다. 문제는 새로운 기준, ‘뉴 노멀’을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 지킬 수 있느냐였습니다.

2019년 1월 그리고 2월에 SBS가 잇달아 보도한 ‘손혜원 의원 목포 부동산 관련 의혹’과 ‘환경부 블랙리스트 청와대 개입 의혹’은 문재인 정부가 만들어 낸 ‘뉴 노멀’을 문재인 정부와 여당이 스스로 지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첫 번째 시험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두 사건 모두에서 청와대와 여당은 자신들이 과거 정부에 적용했던 기준을 스스로에게 적용한 것에 실패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은 몇 달 뒤 벌어진 ‘조국 사태’의 예고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2019년 2월, ‘환경부 블랙리스트 청와대 개입 의혹’에 대한 보도로 저와 동료들은 한국기자협회가 주관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했습니다. 저는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적폐 청산 시대 이후 권력기관의 권한 행사는 이전과 같을 수 없게 됐다.”며 “앞으로도 권력이 올바른 방식으로 행사될 수 있도록 감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라고 썼습니다.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46072

1심에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청와대 비서관에게 유죄가 선고된 이후 당시의 수상 소감을 읽어보니 새로운 느낌이 듭니다. 특히 청와대 대변인이 1심 판결이 선고된 이후에도 “문재인 정부에는 블랙리스트가 없다.”며 ‘환경부 블랙리스트 의혹’이라는 성격 규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한 것을 보니, 여전히 현 정부는 자신들이 만들어낸 ‘뉴 노멀’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적폐청산 작업이 만들어낸 ‘뉴 노멀’이 잘못되었고 실현 가능한 새로운 기준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적폐청산을 주도한 세력은 적어도 자신들이 상대에게 적용한 기준을 준수하거나, 적어도 자신들이 설정한 기준을 지키지 않은 사실에 대해 정치적-윤리적 책임을 져야할 것입니다. 집권 세력이 상대에겐 엄격한 기준을, 우리 편에게는 느슨한 기준을 적용하는 일이 계속 용인된다면 우리 사회는 윤리적 기준 대신 다수파와 소수파 사이의 힘싸움과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난장판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적어도 공적 이슈를 다루는 언론인이라면 ‘누가 우리 편인지’, ‘총체적 관점에서 볼 때 누가 더욱 선한 세력인지’보다, 권력을 잡은 세력이 법률적-윤리적 기준을 잘 지키고 있는지, 기준을 지키지 않고 권력을 남용하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들이 한 말에 대해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에 대해 사안 별로 따져보는 일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치어리딩’을 ‘언론개혁’이라고 포장하는 선동가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지만, 힘 닿는 데까지는 할 일을 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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