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단어들의 일관성

아름다운 말을 하는 것은 쉽다. 바라는 바가 있을 때 아름다운 개념 몇개를 골라서 이용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또 다른 단어 몇 개를 골라서 새로운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하고,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사건을 다뤄야 하는 사람들은 일관성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 대표들에 대해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재판부는 제조사가 사용한 물질과 피해자들의 피해 사이의 인과관계가 형사재판에서 인정할 정도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안타까운 일이다. “피해자의 몸이 증거”라는 말도 있지만, 이런 슬픈 이야기까지 하지 않더라도 피해를 호소하는 많은 분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상식이 재판 과정에서 “입증”되었는지에 대해서 1심 재판부는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는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 라든가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사람을 억울하게 처벌하지 말라’는 우리가 흔히 들어본 법조계 격언을 실천에 옮긴 행위다. 이 사건에서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 대표들은 누군가에 대한 억울한 처벌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놓쳐버린 열 명의 범인 가운데 일부일 수 있다.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더라도..’라는 원칙이 교과서 안에서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열 사람의 범인 때문에 고통받은 사람들의 눈물을 이 원칙이 닦아줄 수 없다.

그렇다고 검사와 피고인 사이의 무기평등의 원칙이라든가, 적법절차의 원칙 같은 당사자주의의 요소들이 불피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언제든 억울하게 기소된 피고인이 될 수도 있다. 국가권력의 행사를 통제하는 적법절차의 원칙은 너무나 중요하고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격언 역시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다. 무언가를 주장할 때는 당장 눈 앞에 보이는 ‘우리 편의 이익’이나 ‘분노할 만한 어떤 것’에 도움이 되는 아름다운 말들만 늘어놓기 보다는, 어느 경우에나 일관성있게 원칙을 적용하기 위해서 무엇을 희생해야 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정부 들어 끊임없이 화두가 되고 있는 검찰개혁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의 직접수사권을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에 찬성한다. 검찰의 권한 행사가 보다 엄격한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개혁 방향에도 찬성한다. 검찰 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없앤 형사소송법 개정안도 명분은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사방식을 바꾸고, 검사의 권한 행사를 축소하고, 형사소송의 기초적인 부분까지 개혁했다면, 지금까지 이런 제도를 통해 수행해왔던 기능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도 설계되어야 한다. 올해부터 시행되고 있는 형사절차와 관련된 여러가지 새로운 제도가 일관성 있는 설계도에 기반한 것인지는 의문이 든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은 실체 진실의 발견이라는 점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이 책임을 누가 져야할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상황은 아름다운 말을 활용해서 무언가를 주장할 때 일관성과 현실성을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아프게 일깨운다. 이런 고민 없이 아무말이나 하는 사람들이 계속 권력을 휘두른다면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비극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반복될 것이다.


아래는 이재상과 조균석의 [형사소송법] 교과서에 나오는 실체진실주의, 직권주의, 당사자주의에 대한 설명이다.

“통설은 실체진실주의를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으로 나누어 적극적 실체진실주의와 소극적 실체진실주의를 구별하고 있다. 적극적 실체진실주의란 범죄사실을 명백히 하여 죄 있는 자를 빠짐없이 벌하도록 하는 것이며, 열 사람의 범인이 있으면 열 사람의 모두 유죄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에 대하여 소극적 실체진실주의는 죄 없는 자를 유죄로 하여서는 안 된다는 원리로서, [열 사람의 범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사람의 죄 없는 사람을 벌하여서는 안 된다] 또는 [의심스러운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무죄추정의 원리를 강조한다.”

“대륙의 직권주의적 형사소송구조에서는 전자에 중점이 있었으나 영미의 당사자주의적 형사소송구조에서는 후자에 중점이 있고, 당사자주의가 강화된 형사소송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소극적 실체진실주의가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주의의 이념은 한편으로는 당사자주의의 결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중략) 소송의 운명이 당사자의 소송수행에 대한 열의와 능력에 좌우되는 결과 소위 사법의 스포츠화를 초래하고 국가형벌권의 행사가 당사자의 무분별한 타협이나 거래의 대상이 될 위험이 있다.”

“직권주의에서는 1. 법원이 실체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검사나 피고인의 주장 또는 청구에 구속받지 않고 직권으로 증거를 수집 조사해야 하며 (중략) 대륙의 형사소송법학에서 직권주의를 실체진실주의와 동의어로 해석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형사소송법은 당사자주의와 직권주의를 조화한 소송구조를 채택하고 있다. 더욱이 당사자주의를 대폭 도입한 결과 표면적으로는 형사소송 기본구조가 당사자주의라고 볼 수 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형사소송구조는 ‘당사자주의 소송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또한 재판실무도 그와 같은 전제하에 운용되고 있다’ (헌재결 1995. 11. 30, 92 헌마 44)라고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