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장 공개와 우측통행

공소장 국회 제출 거부 방침을 설명하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 / 2020. 02. 11. / 경기도 과천 법무부 청사

우리나라는 차량의 ‘우측통행’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매우 오랜 기간 ‘우측통행’ 제도를 실시해왔지만 논란이 된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국토교통부장관이 앞으로 차량이 ‘좌측통행’하도록 제도를 바꾸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우측통행’ 제도가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기 때문에 “잘못된 관행”을 바꾸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보다 교통 선진국인 미국도 ‘우측통행’을 하는데, 갑작스럽게 ‘좌측통행’으로 바꾸자는 거에는 다른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그러자 국토부 장관은 목적은 오로지 국민의 안전이라며 미국도 알고 보면 ‘우측통행’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미국에서 교통경찰관을 했던 사람 등이 국토부 장관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밝혔습니다.

거짓말이 드러나자 국토부 장관은 “외국에서 우측통행을 하는지 안 하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국토부 장관의 참모는 우리나라 근대적 교통 체계의 모델이 된 일본은 ‘좌측통행’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면서 국민의 안전을 위한 ‘좌측통행’ 정책을 계속해서 밀어붙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공소장 국회 제출 거부’ 방침을 차량의 ‘좌측/우측통행’에 비유해봤습니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는데, 국토부 이야기는 가상의 상황입니다.) 이른바 ‘진보 성향’ 법률가들의 말과 글 때문입니다. ‘청와대 선거 개입 의혹’ 사건 공소장을 계기로 국회 제출 거부를 시작한 것은 유감이라면서도, 공소장 국회 제출 거부 자체는 충분히 논의해볼만한 이슈라고 지적하더군요. 마치 주장의 방향을 옳지만 주장을 제기한 시점 때문에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있다는 식으로요.

이런 분들께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언제부터 우리 사회에서 ‘공적인 인물의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장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이 논란이 됐습니까? 이런 글을 쓰는 ‘진보 성향’ 법률가들이 이번 일이 있기 전에 ‘공인의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장을 국회에 제출하는 방침’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나요? 만약 그런 적이 있다면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이 국회에 제출될 때였나요? 아니면 김기춘 전 비서실장의 공소장이 제출될 때였나요? 도대체 언제였죠?

‘좌측통행’과 ‘우측통행’이 그렇듯이 공소장의 공개 시점도 공소장 내용이 공개되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사회적 합의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나라에 따라서 ‘좌측통행’을 하는 나라도 있고, ‘우측통행’을 하는 나라도 있듯이, 공소가 제기되자 마자 곧바로 대중에 공소장을 공개하는 나라도 있고(미국), 법정에서 공소사실이 공개되기 전까지는 공소장 원문 공개를 꺼려하는 나라도 있습니다(법무부 주장에 따르면 독일) 어느 쪽이 분명한 선이고 어느 쪽이 분명한 악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추미애 장관처럼 미국 사례 등을 왜곡해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사용한 뒤에, 허위 발언이 들통나니 본질적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죠. 고위공직자로서 부적절한 행태일 뿐만 아니라, 정상적 사회생활을 하는 평범한 사람으로서도 용납되기 힘든 태도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왜 이 시점에 제도를 바꾸려 하느냐”입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논란이 된 적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우리나라에서 차량의 ‘우측통행’이 잘못됐으니 바꾸자고 주장해온 사람이 몇이나 되나요? 마찬가지로 청와대 관계자들의 선거 개입 혐의에 대한 공소장을 추미애 장관이 국회에 제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기 전까지, 공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의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장을 법무부가 국회에 제출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몇이나 됐나요? 아마 차량의 우측통행을 좌측통행으로 바꾸자고 주장해온 사람들의 수와 비슷할 겁니다.

더욱 웃긴 것은 추미애 장관과 민주당 의원, 그리고 지금 ‘그래도 공소장 국회 제출 관행엔 문제가 있으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라며 가까스로 입장을 줄타기하고 있는 ‘진보 법률가’ 중 상당수는 불과 얼마 전까지도 박근혜, 최서원, 우병우, 양승태 등의 공소장 공개를 요구했거나, 공개된 공소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우측통행이나 좌측통행이나 모두 장단점이 있듯이, 어떤 시점에 공소장을 공개하는 것이 적합한지 역시 역사와 문화, 제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지금 일부 ‘진보 성향’ 법률가들이 우회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처럼, 공적 인물의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장을 국회에 제출하는 것이 법원에서 공개되기 전까지 국회 제출을 거부하는 것보다 반드시 나쁜 제도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더구나 15년 가까이 이 같은 관행이 이어져오면서도 이와 관련된 진지한 문제제기가 우리 사회에서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공소장 국회 제출 방침을 바꾸자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멀쩡하게 ‘우측통행’ 잘 하고 있는데 갑자기 ‘좌측통행’이 더 안전하다는 말을 하는 셈이죠.

저의 개인적 입장을 밝히자면, 공인의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장의 국회 제출은 15년 간의 관행대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국회나 언론이 공적 존재가 아닌 인물에 대한, 공적 사안이 아닌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장을 제출해달라고 요구한다면 거부하는 것이 맞겠죠.

하지만, 공인이 아닌 사인에 대해서 국회나 언론이 요구할 이유도 별로 없을 뿐만 아니라, 그도일에도 수사하거나 기소한 검사가 해당 사건의 공소장 공개가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밝히면 법무부는 대부분 이를 수용해 국회 제출을 거부해왔습니다. (공적 사안이 아닌 공소장이 제출된 적도 일부 있었을 가능성은 있는데, 그렇다해도 이런 문제를 고치는 방법이 공소장 국회 제출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아니겠죠.)

게다가, 법무부가 ‘형사사건 공개 금지 등에 관한 규정’이라는 훈령을 일방적으로 제정해서 기소되기 이전인 사안에 대한 알권리를 극단적으로 제한해놓은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기소 이후의 공소장 공개 범위조차 줄이는 것은 국정농단이나 사법농단 사건 때와는 달리 조국 전 장관 관련 사건 때부터 갑작스럽게 축소된 알권리를 더욱 협소하게 만드는 조치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공소장 국회 제출을 거부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진짜 이유’입니다. 이전까지 논란이 된 적도 없고, 그 자체로 특별한 문제가 있다고 보기 힘든 방침을, 갑작스럽게 ‘하필이면 이번부터’ 바꾸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상식적 사람이라면 누구나 추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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