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응논리 전파? 진짜 중요한 건…

“미국도 제1회 공판기일이 열린 뒤에 공소장 게시”한다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의 발언과 이를 어떻게든 정당화해보려는 궤변들이 거짓이라는 걸 입증하는 종합 팩트체크 취재파일을 썼습니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아래와 같은 글이 반복적으로 포털 댓글에 나타나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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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도 기소장(bill of indictment)을 그대로 공개하지 않고 대배심이 승인해 공소장(indictment)을 발부하는 경우에만 공개한다(경범죄는 예외). 즉, 검사의 일방적 주장을 대배심이라는 필터링을 거쳐 공개하는 것이다. 한국법제하에서는 1회 공판기일에서 공소장진술과 이에 대한 심사(공소장일본주의에 위배되는지 여부 등에 대한 심사)가 이런 필터링에 해당한다. 고로 추미애장관과 법무실장의 얘기가 취지상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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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올리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일종의 대응논리를 담은 똑같은 댓글이 반복되는 현상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대응논리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는 점이네요.


공소제기 또는 공소는 말 그대로 public prosecution 입니다. 이를 행사하는 권한을 기소권 또는 소추권이라고 합니다. 기소를 담당한 기관은 ‘누군가 범죄 혐의가 있다.’라며 재판에 넘길 권한을 갖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이 권한이 ‘검사’라는 기관에 부여됩니다. 그래서 단독관청이라고도 하죠. 검사의 기소 이후 법원에서 시작되는 절차가 형사재판 절차입니다.

미국 연방법에서는 법정형이 징역 1년을 초과하는 중죄(felony)의 경우 소추권/기소권을 가진 기구는 대배심(grand jury)입니다. 피고인 또는 변호인, 그리고 판사가 없는 상태에서, 대배심원들이 검사의 설명과 증인의 증언 등 증거를 보고 공소제기 public prosecution 여부를 결정하죠.

즉, 공적인 기소, 공소 public prosecution의 권한이 한국에는 검사에게, 미국 연방법에서는 (중죄의 경우) 대배심에 부여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을 형사법정에 넘길 정도로 신빙성이 인정되는 상황을 한국에서는 ‘검사가 공소를 제기하는 경우’로 본 것이고, 미국에서는 중죄의 경우 검사의 설명을 들은 ‘대배심’이 공소장(indictment)을 발행한 경우로 정한 것이죠.

두 가지 법제 모두 장단점이 있고, 단순히 이 절차 하나를 놓고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대배심 역시 검사의 기소 의견을 인정하는 비율이 대단히 크기도 합니다. (그래서 연방법과 비슷하게 대배심 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일부 주에서는 폐지론도 나온다고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륙법계 국가에서 검사의 공소장은 법제상 미국의 대배심이 발행한 공소장(indictment)과 동일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대배심과 유사한 제도를 도입해서 한국에서 검사의 기소권을 좀 더 통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앞서도 말했듯이 충분히 검토할 만한 ‘검찰개혁’ 방안입니다. (오히려 최근의 검찰개혁 논의 과정에서 부당하게 경시된 측면이 있죠.) 하지만, 그렇다고 현행 우리 법제에서 그리고 세계 여러나라에서 공적인 기소 public prosecution 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검사의 공소제기가 미국의 대배심기소(grand jury indictment)와 달리 공적으로 공개될 가치가 없다는 주장은 터무니 없습니다.

또, 저 설명 중 “한국법제하에서는 1회 공판기일에서 공소장진술과 이에 대한 심사(공소장일본주의에 위배되는지 여부 등에 대한 심사)가 이런 (미국 대배심의) 필터링에 해당한다.”라는 주장 역시 사실관계가 완전히 잘못된 주장입니다.

일단 법원의 정식재판과 대배심을 수평 비교하는 것 자체도 터무니 없지만, 저 주장대로 한국의 1회 공판기일이 “이런 (대배심의) 필터링에 해당”한다면 1회 공판기일에서 판사가 검사의 기소가 잘못됐다고 판단하면 공소기각이나 무죄 판결을 내려야 합니다. 하지만 1회 공판기일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일을 하는 절차가 아닙니다.

더구나 1회 공판기일은 엄격히 비밀이 보장되는 대배심과 달리 공개재판 절차입니다. 공개재판에서 검사가 공소사실을 모두진술해야 한다는 법률상 의무조항(형사소송법)이야 말로, 한국 법제에서의 검사의 공소제기가 미국의 대배심에서 비공개 상태로 개진되는 검사의 설명과 달리 ‘공개적으로 알려저야 하는 공적인 기소’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간단히 반박하려고 했는데 또 길어졌습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이미 명백한 허위사실로 드러난 추미애 장관의 ‘미국도 제1회 공판기일이 열리면 공소장 게시’라는 잘못된 발언이 아닙니다.

공개재판에서 공개되는 공소장의 내용, 따라서 공적인 알권리가 이미 법률에서 보장되어 있는 고위공직자의 범죄 혐의에 대한 공소장을, 15년 동안의 방침을 깨고, 법률에 근거한 국회의 자료 제출 요구를 거부하면서까지 ‘하필이면 이번부터’ 비공개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추미애 장관에게 물어야 합니다.

왜 이 사건부터입니까?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던 여러 차례의 허위주장은 ‘무엇’ 때문이었는지 국민은 알권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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