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판사]의 문장들


오랜만에 비가 내리지 않던 밤에 [혼밥판사]를 읽었다. 정재민 (Jaemin Choung) 작가가 월간지에 연재했던 글을 모아서 펴낸 에세이집이다. 판사 시절의 경험을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풀어놓은 글이지만, 이 책에서 정말 빛나는 대목은 법에 대한 것도 음식에 대한 것도 아니다. 작가의 말대로 “음식이라는 소재를 빌려 사람들과 삶과 세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소화가 쉬운 음식처럼 술술 넘어가는 문장에 담긴 작가의 생각이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책. 휴가지 수영장 옆에서 읽기에도 좋고, 자기 전 침대에서 들춰보는 재미도 상당하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조금 많이)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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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짓말을 많이 하는 마약중독자들도 잘 하지 않는 거짓말이 있다. 스스로 마약을 끊었다는 것이다. 자신을 “시베리아 벌판에서 굶주리던 늑대”라고 지칭하던 어느 필로폰 중독자는 “칼에 꽂혀 있는 시뻘건 오소리의 간을 보고 그만 눈이 멀어서 핥아 먹다가 아가리가 칼에 베이는 줄도 몰랐습니다.”라며 마약의 중독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적도 있었다,(너무 문장이 좋아서 따로 적어놓았었다.) 나도 옛날에 노란 냄비에 담겨 있던 뻘건 라면을 보고 그만 눈이 멀어서 핥아 먹다가 나트륨에 몸이 베이는 줄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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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쪽으로 생각해보지는 못했을까. 그날의 사건은 법조인으로서 일의 무서움을 처음 체감한 계기였다. 내가 과연 그런 일을 감당할 자격이 있는지 고민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후 한동안 라면을 먹지 못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그 시절의 순수함도 그때의 죄책감도 희석되었고 나는 다시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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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 한점을 집어 먹어보았다. 양념과 육즘이 해안가의 파도처럼 어금니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고소하고도 달짝지근했다. 단맛을 배로 낸 것인지, 설탕으로 낸 것인지, 물엿으로 낸 것인지 궁금했다. 고기를 한번씩 더 씹을 때마다 양념과 육즙과 내 침의 아밀라아제가 뒤섞이는 농도가 달라져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나는 만족감에 취해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혼자서 씩 웃었다. 마치 소가 웃듯이. 흥겨워진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엘비스 프레스리의 [Tutti Frutti]를 틀었다. “밥 빠빠 룰라 왑 밥뿌, 두리 뿌리 오 루리, 두리 뿌리 오 루리” 음악에 맞춰 고기를 씹으며 공개를 끄덕인다. 왠지 돼지갈비에는 로큰롤이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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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시체만큼 처참한 비극이었다. 청춘의 남녀가 다투어서 남자는 살인자가 되고 여자는 시체가 되었다. 당사자가 아니니 나도 다 아는 것처럼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이유가 과연 제가각 살인자와 시체가 될만한 일이었을까. 청춘은 겉보기에는 아름답지만 속은 벼려진 칼날처럼 날카롭고 위험하다고 생각햇다. 돌아보면 그때는 나도 청춘이었는데 청춘이 좋았는지는 몰랐던 그 시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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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적으로 대단한 글은 아닐지라도 내 마음 상태를 군더더기 없이 표현하는 문장을 쓰고 싶지만 그에 닿지 못해 안타까운, 작가라는 명패가 홍어 네마리. 그 홍어들이 내 콧등을 톡 쏘아 코를 납작하게 만든다. 묘하게도 그럴수록 또 다시 달려들게 만든다. 그럴수록 마신 탁주의 양이 늘어나고, 해가 바뀔수록 홍어 맛이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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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본고사가 개시된 법과대학 현관 앞에서는 수험생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옷을 춥게 입은 어머니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서 하숙집에서 쉬고 계시라고 했다. 그러자 어머니는 고개를 건성으로 끄덕이면서 나에게 어서 시험장에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오전 시험을 마치는 종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점심 도시락을 먹지 않고 1층 현관으로 내려가봤다. 성에가 가득 낀 현관 유리창을 손바닥으로 닦아보니 예상대로 어머니가 아침에 본 그 자리에서 눈을 감고 무덤처럼 고요하게 서 있었다. 문이 잠겨 있었기 때문에 내가 밖으로 나가거나 어머니가 안으로 들어올 수는 없었다. 대화도 어려웠다. 나는 주먹 쥔 손의 가운뎃손가락 마디로 유리창을 톡톡 두들겼다. 몇 번을 반복하자 인기척을 느낀 어머니가 눈을 떴다. 나는 잠시 어머니를 쳐다보다가 한자 한자 입 모양을 만들었다.
“시.험.잘.봤.어.요.”
어머니는 처음에는 내 입이 하는 말을 못 알아들었다. 나는 더욱 천천히 같은 입 모양을 반복했다. 비로소 어머니가 알아들은 것 같았다. 어머니의 깡마른 얼굴이 풀리면서 미소와 함께 불그스름한 생기가 돌았기 때문이다. 마치 이제 막 갈비탕 한 그릇을 다 비운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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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두부가 좋다. 좀더 정확히 내 마음을 살펴보자면 두부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마치 나에게 아무런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지만, 톡 쏘는 매력이나 개성은 없지만, 그저 순하디순하고 착하디착한 사람을 그 자체로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과 같다. 자기는 그런 사람이 못되지만 그런 사람을 좋아할 줄 아는 사람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이랄까. 재판을 하면서 갖가지 탐욕을 보았지만 두부를 훔치거나 두부를 더 가지려고 다투는 경우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두부에는 아무리 욕심을 내도 탐욕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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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부에 대한 글을 쓰고 있으니 제주에서 먹은 두부가 다시 그립다. 겉껍질과 속살이 하나같이 순하게 몽글몽글한 두부가 그립다. 화창한 어느 봄날에는 따뜻한 햇삿을 온 얼굴로 받으며 작은 도자기 그릇에 담긴 두부를 흰 자리로 만든 뭉툭한 손가락으로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내면서 떠먹고 싶다. 볕이 잘 드는 마당에 드러누운 채 나른하게 하품하는 고양이를 구경하면서. 두부를 입속에 넣고 고개를 들고 눈을 감고 입을 천천히 오물거리며 두부의 온도와 감촉을 느끼고 싶다. 두부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 수만 잇다면 두부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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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수준 이상의 글을 쓰려고 욕심내는 것도 아닌데 왜 이릴 글쓰기가 어려운지. 가수 박진영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강조한 “공기 반, 소리 반”을 “문장 반, 마음 반”으로 실천하고 싶을 뿐. “왼손은 거들 뿐”이라는 슬램덩크의 슛 가르침대로 “문장은 거들 뿐”을 실천하고 싶을 뿐.
쓸 수만 있다면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초여름, 잎이 무성한 활엽수 아래에서 고개를 쳐들고 정수리 위쪽을 올려다보았을 때 호수같이 파란 하늘을 바탕으로 시원한 초록색 잎들이 금목걸이를 두른 것처럼 햇살에 반짝거리는 장면 같은 글. 커피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커피에 비유하자면 잘 내린 커피 한잔 같은 글. 라테처럼 부드럽고, 에스프레소처럼 응축되고, 카푸치노처럼 스타일리시한 글.(아메리카노처럼 맹물이 잔뜩 들어간 글 말고.) 이처럼 좋은 글이 무엇인지에 대해 쓰는 것은 쉽다. 자기가 좋은 사람이 되기는 어려워도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말하기는 쉬운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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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과 19범이던 어느 피고인도 잊기 어렵다.
“판사님, 지금은 우리나라 법치주의의 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왜죠?”
“술집에서 소란 좀 피웠다고 저보다 나이도 어린 경찰이 다짜고짜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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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년간 그날의 모닝빵을 만드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써왔습니다. 모닝빵은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다기보다는 정성이 중요하지 않을까 짐작해봅니다. 저는 좁고 허름하더라도 깨끗한 가게를 마련하고, 창가에는 원목 테일블과 삐걱거리지 않는 튼튼한 의자를 놓고, 제가 여러번 들어서 고른 잔잔한 음악을 틀고, 갓 볶아 향이 좋은 커피를 내리고, 반짝이는 은 나이프를 갈색 냅킨 위에 올려놓고, 새벽에 구입한 신선한 우유, 보드라운 버터와 함께 따뜻한 새 모닝빵을 내어놓는 마음으로 이글을 썼습니다. 혼자서 밥을 먹는 모든 이들에게 하루를 버틸 수 잇는 힘이 되면, 사는 듯 사는데 필요한 힘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 모쪼록 맛있게 드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