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민주주의’와 태극기 부대

브라질 다큐멘터리 ‘위기의 민주주의’ 포스터

[위기의 민주주의]라는 나온 지 한참 지난 다큐멘터리를 언급하는 사람이 요즘 많다. 특히 정경심 교수에 대해 1심 재판부가 징역 4년을 선고하고, 윤석열 총장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집행한 정직 징계 처분을 서울행정법원이 집행정지 결정한 이후 이 다큐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다큐의 핵심 내용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브라질 대통령들을 검찰과 법원이 감옥에 보내 “사법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상황도 이와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 열성 지지자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모양이다. 지난 12월 24일 임혁백 고려대 명예교수가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도 비슷한 정서가 느껴진다.

“모루는 당시 지지율 80%의 룰라에 대한 사법 공격에 들어갔고, 2017년 돈세탁과 간접적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시킴으로써, 룰라의 2018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략) 브라질의 신흥 민주주의는 과거처럼 군부 쿠데타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 아니라, 사법권력과 법률지식을 동원한 검찰과 언론에 소리 없이 스텔스적인 방식으로 전복되고 있다.”

[기고] 사법쿠데타에 의한 브라질 민주주의의 전복 / 임혁백 (한겨레신문, 2020년 12월 24일)

그런데 나에게는 [위기의 민주주의]를 언급하며 언론의 음모와 검찰과 법원의 “사법쿠데타”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야 말로 현 정부를 열성적으로 지지하는 일부 사람들이 정반대 진영의 극단적 지지자들과 비슷한 존재가 됐다는 결정적 증거로 보인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을 언론과 검찰, 그리고 법원이 쿠데타를 일으켜 쫓아냈다는 주장을 먼저 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열성적 지지자들인 ‘태극기 부대’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돈 한 푼 받은 적이 없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일부 언론의 정치적 의도를 가진 보도와 윤석열을 비롯한 특수부 검사들의 무리한 수사, 그리고 헌재 재판관들과 법관들의 배신 때문에 탄핵되고 감옥에 갔다고 주장했다. “사법쿠데타”라는 말도 이들이 먼저 사용했다. 촛불집회의 계기를 마련한 TV조선과 JTBC의 보도는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음모론도 이들은 여전히 진심으로 믿고 있다. 브라질 민주주의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인용할 정도로 문화적으로 세련되지는 못했지만 “사법쿠데타”론에 대한 지적 재산권은 이들에게 있다.

하지만 ‘태극기 부대’의 주장과 달리 법을 위반한 고위공직자에 대해 언론이 비판하고 검찰이 기소하고 법원이 유죄를 선고하는 것, 법의 범위를 이탈한 국가권력 행사를 언론이 비판하고 법원이 중단시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를 네 글자로 ‘법치주의(法治主義)’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는 ‘법의 지배(rule of law)’라고 한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권력 역시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권력을 행사해야 하며, 누구든지 권력을 남용하거나 법을 위반할 경우 비판받고 처벌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법의 지배(rule of law)’의 의미를 잘 몰랐던 한 여당 의원은 “위험한 단어”라고 비난한 적도 있지만, ‘법치주의’ 또는 ‘법의 지배’는 정상적인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당연히 관철되는 기본 원리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언론과 검찰과 법원 때문에 탄핵되고 감옥에 간 것은 법치주의 원칙이 작동한 사례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언론과 검찰과 법원이 ‘선출된 권력’인 문재인 정부의 권력 행사 또는 정부 핵심 인사의 행위에 제동을 거는 것 역시 법치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이를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나 “쿠데타”라고 부르는 것은 무식할 뿐만 아니라 자기객관화가 전혀 안 되는 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선출된 권력’인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불과 몇 년 전 같은 방식으로 감옥에 간 것을 두고는 법치주의의 구현이라고 칭송했기 때문이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비리 혐의는 사실이었고, 조국과 정경심의 비리 혐의는 검찰이 조작한 것이기 때문에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존재하는 비리를 처벌하는 것은 법치주의지만, 조작된 혐의를 처벌하는 것은 사법쿠데타라는 논리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안타깝게도 박근혜-최순실의 비리 혐의 기소를 주도한 검사들과 조국-정경심의 비리 혐의 기소를 주도한 검사들은 같은 사람들이다.

검사가 같더라도 최순실의 비리는 사실이고, 정경심의 비리는 조작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같은 검사가 한 번은 사실 그대로 기소했지만, 다른 한 번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조작했다는 주장일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면서 돈을 버는 유튜버나 방송인들도 여럿 있다.

그렇다면 검사가 기소한 범죄사실 중 어떤 것이 사실이고 어떤 것이 조작인지 판단하는 권한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어디에 부여되어 있나? 법원이다. 양심에 따라 독립적으로 재판하는 법관에게 부여되어 있다. 그런데 당신들은 법관이 내린 판단을 두고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사법쿠데타”라고 하지 않나? 그럼 도대체 진실과 조작의 기준으로 당신들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김어준의 방송? 조국의 소셜미디어 글? 하긴 2016년까지의 조국의 글에는 진실에 근접한 것이 많긴 했다. 그렇더라도 사법 시스템을 통해서 도출된 결과가 아니라, 지지자들이 믿고 따르는 지도자들의 생각을 진실과 허위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네 글자로 ‘전체주의(全體主義)’라고 부른다.

[위기의 민주주의]를 언급하면서 언론의 음모와 검찰과 법원의 사법쿠데타를 주장하는 당신들은 슬프게도 당신들이 가장 혐오하는 사람들과 비슷한 존재가 됐다. 더욱 슬픈 일은 당신들을 이용해 권력을 유지하고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기본적인 자기객관화가 안 되면서 전체주의적 열정에 빠져있는 유아적인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위기의 민주주의’를 초래한 진짜 원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