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도서출판 어크로스, 2018.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파시즘과 공산주의, 혹은 군부 통치와 같은 노골적인 형태의 독재는 전 세계적으로 점차 종적을 감추고 있다. 최근에는 군사 쿠데타를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폭력적인 권력 장악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의 국가가 정기적으로 선거를 치른다. 그럼에도 민주주의는 다른 형태로 죽어간다.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 붕괴는 대부분은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물론 조지아,헝가리, 니카라과, 페루, 필리핀, 폴란드, 러시아, 스리랑카, 터키, 우크라이나에서도 선거로 추대된 지도자들이 민주주의 제도를 전복했다. 오늘날 민주주의 붕괴는 다름 아닌 투표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선거로 시작된 민주주의 붕괴는 위험하면서도 미묘한 방식으로 이뤄진다.칠레의 피노체트처럼 일반적인 쿠데타에 의한 민주주의 붕괴는 즉각적이고 뚜렷한 형태로 일어난다. 가령 대통령 궁에 불이 난다, 대통령은 피격당하거나 투옥되고 혹은 해외로 추방된다, 헌법은 효력을 잃거나 폐기된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붕괴에서는 이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탱크가 거리로 진격하는 법은 없다. 헌법을 비롯한 형식적인 민주주의 제도는 온전히 남아 있다. 시민들은 예전과 다름없이 투표를 한다. 선출된 독재자는 민주주의 틀은 그대로 보존하지만, 그 내용물은 완전히 갉아먹는다.

많은 독재 정권의 민주주의 전복 시도는 의회나 법원의 승인을 받았다는 점에서 ‘합법적’이다. 심지어 사법부를 효율적으로 개편하고, 부패를 척결하고, 혹은 선거 절차를 간소화한다는 명분으로 민주주의를 ‘개선’하려고까지 한다.

11쪽

그러나 제도만으로는 선출된 독재자를 실질적으로 제어할 수 없다. 정당 체제와 시민사회는 물론 민주주의 규범democratic norm이 필요하다. 그 규범이 무너질 때 헌법에 명시된 권력분립은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민주주의 보호막으로 기능하지 못한다. 독재자는 민주주의 제도를 정치 무기로 삼아 마음껏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중립 기관들을 자신의 입맛대로 바꾸거나 ‘무기로 활용하고’, 언론과 민간 영역을 매수하고(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정치 게임의 규칙을 바꿔서 경쟁자에게 불리하게 운동장을 기울인다. 선거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의 시나리오에서 가장 비극적인 역설은 그가 민주주의 제도를 미묘하고 점진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합법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민주주의를 죽인다는 사실이다

13-14쪽

잠재적 대중선동가는 모든 민주주의 사회에 존재하며, 때로 그들은 대중의감성을 건드린다. 그러나 어떤 사회에서는 정치 지도자들이 경고신호를 인식하고, 이러한 인물들이 권력의 중앙 무대로 올라서지 못하도록 방어한다. 극단주의자나 선동가가 대중의 인기를 얻었을 때 기성 정치인들은 힘을 합쳐 그들을 고립시키고 무력화한다. 물론 극단주의자의 호소에 대한 대중의 반응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정치 엘리트 집단, 특히 정당이 사회적 거름망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이다. 간단하게 말해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문지기gatekeeper인 셈이다.

27쪽

우리는 린츠의 연구를 기반으로 잠재적인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경고신호를 개발했다.18 우리는 1)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고, 2)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고, 3)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고, 4) 언론의 자 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는 정치인을 유심히 지켜봐야 한 다. 우리는 이러한 네 가지 기준으로 정치인을 평가하는 방법을 [도표 1]에 요약 해서 설명해놓았다.

[도표 1] 전제주의 행동을 가리키는 네 가지 주요 신호

1) 민주주의 규범에 대한 거부 (혹은 규범 준수에 대한 의지 부족)
시민권 및 정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가?
권력을 잡기 위해 군사 쿠데타나 폭동, 집단 저항 등 헌법을 넘어선 방법을 시도하거나 지지한 적이 있는가?
선거 불복 등 선거제도의 정당성을 부정한 적이 있는가?

2) 정치 경쟁자에 대한 부정

정치 경쟁자를 전복 세력이나 헌법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한 적이 있는가?
정치 경쟁자가 국가 안보나 국민의 삶에 위협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 는가?
상대 정당을 근거 없이 범죄 집단으로 몰아세우면서, 법률 위반(혹은 위반 가 능성)을 문제 삼아 그들을 정치 무대에서 끌어내려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
적이 있는가?
폭력에 대한 비난이나 처벌을 부인함으로써 지지자들의 폭력 행위에 암묵적
으로 동조한 적이 있는가?
과거나 다른 나라에서 벌어진 심각한 정치 폭력 행위를 칭찬하거나 비난을 거부한 적이 있는가?

4) 언론 및 정치 경쟁자의 기본 권을 억압하려는 성향
명예훼손과 비방 및 집회를 금지하거나, 정부 및 정치조직을 비난하는 등 시 민의 자유권을 억압하는 법률이나 정책을 지지한 적이 있는가?
상대 정당, 시민 단체, 언론에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는가?
과거에 혹은 다른 나라의 정부가 행한 억압 행위를 칭찬한 적이 있는가?

이러한 기준 중 하나라도 충족한다면 우리는 그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정치인들이 전제주의 리트머스 테스트에서 양성반응을 보이는 가? 주로 포퓰리즘 아웃사이더가 그렇다. 포퓰리스트는 기성 정치에 반대한다. 그들은 자신이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부패하고 음모를 꾸미는 엘리트 집단과 전쟁을 벌이겠다고 주장한다.

28-29쪽

끊임없이 도전하는 극단주의 선동가들

2016년 이전 미국 대선에서 극단주의 선동가가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한 이유는 그러한 선동가의 역할을 맡았던 도전자가 없었기 때문은 아니다. 또한 이들 선동가들이 대중적 인기를 끌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극단주의 인물은 미국 정치 역사에서 끊임없이 존재했다. 1930년대에 미국 내 극단주의 우파 집단은 800곳을 넘어섰다.1 대표 인물로 찰스 코글린Charles Coughlin을 꼽을 수 있다. 유대인을 혐오했던 가톨릭 신부 코글린이 진행을 맡았던 민족주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매주 4천만 명이 들었다. 공공연한 반민주주의자이기도 했던 코글린은 정당 제도의 폐지를 촉구했고, 선거제도의 가치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1930년대 코글린이 발행한 신문, 〈사회정의Social Justice〉는 파시스트 지지자의 주장을 실었고, 무솔리니를 “금주의 인물”2로 선정하는가 하면 종종 나치 정권을 두둔하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극단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코글린 신부의 인기는 대단히 높았다. 〈포천Fortune〉지는 그를 “라디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았다.3 코글린은 미국 전역을 돌면서 관중이 들어찬 경기장이나 강당에서 연설을 했다.4 그가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는동안 열렬한 지지자들은 그를 보기 위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5 일부 평론가는 그를 루즈벨트 이후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꼽았다

41쪽

잠재적 독재자의 위협으로부터 미국 사회를 지켜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확고한 의지가 아니라 민주주의 문지기, 다시 말해 미국의 정당체제였다.

44쪽

그러나 다른 한편 건국자들은 국민이 후보자의 자질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완전히 신뢰하지는 않았다.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대통령 선거제도가 대중의 공포와 무지를 이용해서 선거에 당선되고 난 뒤 본색을 드러내는 독재자에게 쉽게 농락당할 수 있다고 있다고 걱정했다. 해밀턴은 《페더럴리스트 페이퍼Federalist Papers》에서 이렇게 언급했다. “우리는 처음에 국민에게 아첨했다가, 대중선동가로 변신하고, 결국에는 폭군으로 군림해서 공화국의 자유를 허물어뜨린 인물들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27 해밀턴과 그의 동료들은 대통령을 투표로 선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위험을 걸러내는 특별한 장치가 필요하다고 보았다.28

46쪽

또한 이탈리아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는 정부에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웠다.18 언론인들 또한 이들의 공격 대상이 된다. 에콰도르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는 자신을 비난한 언론을 “궤멸해야 할 중대한 정적”이라고 불렀다.19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총리는 저널리스트들이 “테러리즘” 선전에 동원되고 있다며 비판했다.20 이러한 공격은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권에 반대하는 인물이 테러 집단과 연관이 있고, 언론이 가짜뉴스를 퍼트린다는 주장을 대중이 진지하게 받아들일 때 독재자는 그들에 대한 탄압을 쉽게 정당화할 수 있다.

84-85쪽

심판 매수

선출된 독재자는 그들을 제어하도록 설계된 민주주의 제도를 어떻게 허물어뜨리는가? 어떤 독재자는 단번에 무너뜨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은 점진적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시민들 대부분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어쨌든 선거는 주기적으로 실시된다. 야당 정치인은 여전히 의회에서 활동한다. 신문도 그대로 발행된다. 그러나 민주주의 붕괴는 특히 초반에 단편적인 형태로 일어난다. 개별적인 사건만 놓고 본다면 어느 것도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보이지 않는다. 민주주의 체제를 전
복하려는 독재자의 시도는 종종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독재자는 의회 승인을 얻고, 대법원으로부터 합법 판결을 받는다. 가령 부패와의 전쟁, 부정선거방지법, 민주주의 의식 개선, 국가 안보 강화와 같은 시도는 대부분 합법적이며, 심지어 공공의 이익을 위한 노력으로 비춰진다.

선출된 독재자가 민주주의 제도를 허물어뜨리는 미묘한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축구 경기를 떠올려보자. 잠재적 독재자는 승리를 위해 심판을 매수하고, 상대 팀 주전이 경기에 뛰지 못하도록 막고, 그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경기 규칙을 바꾼다. 결론적으로 상대편에게 불리하게 경기장을 기울이는 것이다.

특히 심판 매수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 오늘날 국가들은 공무원과 일반인의 잘못을 수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다양한 사법기관을 운영한다. 가령 법원과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규제 기관이 여기에 해당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제도는 중립적인 중재자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기관은 잠재적 독재자에게 위험이자 동시에 기회다. 이 기관들이 본연의 독립성을 유지할 때 행정부의 권력 남용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한다. 즉, 경기 심판으로서 선수들이 반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하지만 정권의 충신들이 이들 기관을 장악할 때 이러한 제도는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수사와 고발을 차단함으로써 잠재적 독재자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할 경우 대통령은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고, 심지어 수사나 검열에 대한 걱정 없이 헌법을 위반한다. 그리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사로 사법부를 채우고 법 집행기관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권력을 휘두른다.

심판 매수는 보호막 이상의 기능을 한다. 독재자는 법률을 차별적으로 적용함으로써 정적을 처단하고 동지는 보호하는 강력한 무기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세무 기관을 앞세워 야당 인사와 기업인, 언론인을 공격한다. 경찰은 야당 지지자의 시위는 탄압하면서도 친정부 인사의 폭력은 묵인한다. 또한 정보기관을 이용해 정부 비판자를 감시하고, 이들을 협박할 근거를 찾는다.

심판 매수는 주로 공직자나 비당원 관료를 해고하고, 충신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헝가리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2010년 권력에 복귀한 뒤 명목상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검찰과 감사원,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중앙통계처, 헌법재판소를 여당 인사로 채워 넣었다.23

86-87쪽

독립적인 사법기관의 구성원을 마음대로 해임할 수 없는 경우, 독재자는 ‘대법원 재구성court packing’을 통해 우회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헝가리 오르반 정권은 헌법재판소 규모를 기존 여덟 명에서 15명으로 늘렸고, 여당인 피데스당 단독으로 새 재판관을 임명할 수 있도록 법률을 개정했으며, 이를 통해 친정부 판사로 새로운 자리를 메웠다.30

88-89쪽

또한 독재 정권은 종종 명예훼손이나 모욕죄 혐의로 소송을 함으로써 반정부 성향이 강한 언론을 ‘합법적으로’ 경기에 뛰지 못하게 막는다. 에콰도르 대통령 라파엘 코레아는 이러한 기술에 특히 능했다. 2011년 코레아는 주요 일간지 〈엘 우니베르소El Universo〉가 자신을 “독재자”라고 칭한 사설을 게재한 것에 대해 4천만 달러의 명예훼손 소송을 걸었고, 승소했다. 코레아는 그 판결을 “처벌받지 않는 가장 거대한 조직인 부패한 언론으로부터 우리 국가의 자유를 구한 위대한 전진”이라고 평가했다. 라파엘은 나중에 그 언론사 소유주들을 사면했지만, 그 소송은 언론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섬뜩한 영향을 미쳤다.44

92쪽

운동장 기울이기

그러나 독재 정권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들은 게임의 규칙을 바꾼다. 독재자는 헌법과 선거 시스템, 그리고 다양한 제도를 바꿈으로써 저항 세력을 약화하고, 경쟁자에게 불리한 쪽으로 운동장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종종 공공의 선이라는 명목으로 진행된다. 그러나 모든 제도를 권력자에 유리하게 바꾸려는 속임수에 불과하다. 게다가 헌법과 법률의 테두리 안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독재자는 수년, 혹은 수십 년 동안 그 혜택을 누릴 수 있다.

96쪽

민주주의가 죽어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한 가지 중요한 아이러니는 민주주의 수호가 때로 민주주의 전복의 명분으로 활용된다는 사실이다. 잠재적 독재자는 자신의 반민주적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 위기나 자연재해, 특히 전쟁과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 위협을 구실로 삼는다.

101쪽

국가 위기 상황에서 정권에 대한 여론의 지지는 극적으로 높아진다.

102쪽

또한 시민들 역시 국가 안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전제주의 조치에 더욱 관대해진다.

102쪽

잠재적 독재자와 국가 위기가 결합할 때 민주주의는 치명적인 위협을 받게된다.

103쪽

예를 들어 미국 헌법은 대통령이 FBI와 같은 독립적인 정부 기관을 자신의 측근 인사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구체적인 금지 조항을 담고 있지 않다.10 헌법학자 아지즈 후크Aziz Huq와 톰 긴스버그Tom Ginsburg의 설명에 따르면 역대 미국 대통령들이 심판을 매수하거나 정적을 탄압하기 위해 사법부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것은 “얇은 관습의 막”이었다.11

109-110쪽

루즈벨트는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1936년 11월에 루즈벨트는 61퍼센트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인기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의 야심찬 행보는 조만간 예상치 못한 장벽을 맞닥뜨리게 되었다. 그것은 보수주의 성향이 강한(그가 보기에 반동적인) 연방대법원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19세기에 법률 교육을 받은 판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1935년과 1936년에 가장 활발하게 입법 활동을 가로막았다. 특히 뉴딜 정책과 관련하여 다양한 법안을 종종 의문스러운 잣대를 적용하여 위헌으로 판결했다.2 이로 인해 루즈벨트 행정부의 많은 정책이 위기를 맞았다.

1937년 2월 루즈벨트 대통령의 두 번째 임기가 시작된 지 2주가 지났을 때 그는 연방대법원의 규모를 확대하겠다는 의중을 밝혔다. 그의 정적들이 “대법원 재구성 계획court-packing scheme”이라고 부른 이 제안은 헌법의 허점을 파고든 것이었다. 연방 사법제도를 정의하고 있는 미국 헌법 3조는 대법원 판사의 수를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루즈벨트의 제안은 대법원에서 70세 이상의 판사의 수만큼 새로운 판사를 추가로 임명하고, 대법원의 최대 규모를 15명으로 늘리는 것이었다.3 당시 70세 이상의 판사는 총 여섯 명이었으므로, 루즈벨트 제안에 따른다면 여섯 명의 판사를 추가로 임명할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이러한 제안을 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루즈벨트는 뉴딜 프로그램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법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법안이 통과된다면 틀림없이 위험한 선례로 남을 것이었다. 대법원이 정치의 전쟁터가 될 것이며 그 구성과 규모, 임명이 악용될 위험이 높아질 것으로보였다. 그렇게 된다면 미국은 페론의 아르헨티나, 혹은 차베스의 베네수엘라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때 루즈벨트가 자신의 사법 행위를 관철시켰더라면, 대통령이 자신과 동등한 지위에 있는 국가권력기관을 무력화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규범은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다행히 그 규범은 유지되었다. 루즈벨트의 대법원 재구성 계획은 그가 임기에 추진했던 다른 어떤 정책보다 거센 반발을 받았다.4 공화당은 물론 언론, 유명한 법률가, 판사, 그리고 놀랍게도 많은 민주당 인사들까지 반대에 나섰다. 결국 루즈벨트의 제안은 몇 달 후 종적을 감췄다. 그는 자신의 당이 장악하고있던 하원에서도 버림을 받았다. 대공황과 같은 중대한 국가 위기 상황에서도 미국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했던 것이다.

128-192쪽

그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1937년 대법원 재구성을 시도함으로써 이러한 규범을 위반했다. 헌법학자 리 엡스타인Lee Epstein과 제프리 시걸Jeffrey Segal은 루즈벨트의 그러한 행동을 “보기 드문 오만함”이라고 비판했다.56 그러나 루즈벨트 대통령의 대법원 재구성에 대한 저항 역시 보기 드문 것이었다. 당시 루즈벨트의 인기는 대단히 높았다. 그는 압도적인 차이로 재선에 성공했고, 그의 민주당 인사들은 양원에서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중 그처럼 강력한 정치 우위를 누린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루즈벨트의 대법원 재구성은 전면적인 반대에 부딪혔다. 우선 언론이 가차 없는 비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은 그 시도를 “연방대법원에 대한 명백한 전쟁 선포”라고 표현했다.57 의회 또한 즉각 반발했다. 공화당은 물론이거니와 민주당에서도 많은 의원이 반대했다. 미주리 상원 의원 제임스 리드James A. Reed는 루즈벨트의 대법원 재구성 시도를 “사실상 독재를 향한 한 걸음”58이라고 비판했다. 조지아 주 민주당 하원 의원 에드워드 콕스Edward Cox는 그 시도가 “기본적인 법률 취지와 통치 시스템 전반을 바꿔 놓을 것이며, 미국 역사상 법치주의에 대한 가장 중대한 도전”이라고 경고했다.59 뉴딜 정책의 충직한 지지자들조차 루즈벨트에게서 등을 돌렸다. 2주일전 백악관에서 열린 취임 전 만찬에서 엘리노어 루즈벨트 옆자리에 앉았을 정도로 측근인 와이오밍 주 상원 의원 조지프 오마호니Joseph O’Mahoney조차 대법원 재구성에 반대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린 이곳에서는 지금 지독한 마키아벨리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네!”60

141-142쪽

깅리치와 그 측근들은 새로운 정치행동위원회GOPAC를 기반으로 이러한 전술을 공화당 전반에 확산시키고자 했다. 특히 정치행동위원회는 교육용 오디오 테이프를 매월 2000개 넘게 제작하고 배포함으로써 깅리치의 ‘공화당 혁명Republican Revolution’에 새로운 회원을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다. 깅리치의 전 공보 비서 토니 브랭클리Tony Blankley는 오디오테이프를 활용한 깅리치의 전술을 이란에서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가 최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활용한 전술에 비유했다.13

158쪽

공화당이 대통령을 감시해야 하는 역할을 사실상 포기하면서, 행정부에 대한 입법부의 견제 능력은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클린턴이 후원자를 모으기 위해 백악관 크리스마스카드 발송 목록을 사용했다는 의혹을 밝혀내기 위해 하원이 140시간의 법정 증언을 조사했던 반면,40 부시 대통령 취임 후 6년 동안 백악관 인사에 대해 소환장을 발부한 적은 한 차례도 없었다. 하원은 또한 이라크 전쟁에 대한 감시도 포기했다. 다만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된 고문 등 명백한 권한 남용 사례에 대해서만 형식적인 수사를 벌였을 뿐이다. 감시견에서 애완견으로 전락한 미국 의회는 그 제도적 의무를 저버리고 말았다.41

163쪽

둘째, 과거의 극단주의와는 달리 오바마에 대한 공세는 공화당 지도부로까지 이어졌다. 매카시가 활동했던 시기를 제외하고, 한 세기 넘게 미국의 두 정당 사이의 적대감은 정치권 주변부에만 머물렀다. 가령 코글린 신부나 존 버치 협회는 정당 지도부를 움직일 만한 실질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국 전역에서 인지도 높은 정당 지도부들이 앞장서서 오바마 대통령(그리고 이후로는 힐러리)의 정당성을 노골적으로 공격했다.

171쪽

우파 언론의 성장 또한 공화당 선출직 인사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146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 폭스 뉴스 평론가들과 라디오 방송의 유명 우파 인사들은 한결같이 “타협 반대” 입장을 고수하면서, 정당 노선에 충실히 따르지 않는 공화당 정치인들을 거칠게 공격했다.147 예를 들어 캘리포니아 공화당 하원 의원 대럴 아이 Darrell Issa가 공화당도 오바마 대통령과 때로는 협력을 해야 더 많은 이익을 얻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러시 림보는 아이사에게 공개적으로 주장을 철회하고 당의 의사방해 방침에 존경심을 보이도록 강요했다.148

182-183쪽

국가기관을 장악하라

트럼프 대통령은 심판에 해당하는 법 집행, 정보, 윤리, 사법기관에 대해 적대감을 드러냈다.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FBI, CIA,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등 정보기관의 수장들을 불러 개인적인 충성을 요구했다. 명백하게도 그것은 선거운동 과정에서 드러난 러시아 연루 의혹에 대한 수사를 막기 위한 움직임이었다. 트럼프는 취임 후 첫 주에 제임스 코미James Comey FBI 국장을 백악관으로 불러 둘만의 저녁 식사를 했다. 코미의 증언에 따르면 그때 트럼프는 그에게 충성 맹세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 보도에 따르면 최근에 물러난 백악관 전 안보보좌관 마이클 플린Michael Flynn에 대한 수사를 중단하도록 코미를 압박했고, 국가정보국 국장 대니얼 코츠Daniel Coats와 CIA 국장 마이크 폼페이오Mike Pompeo에게 코미의 수사에 개입하도록 지시를 내렸다. 또한 코츠와 마이클 로저스Michael Rogers 국가안전보장국NSA 국장에게 러시아 정부와 그 어떤 공모도 없었다는 성명서를 내도록 요청했다(두 사람 모두 거절했다).5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정부 기관에 불이익을 주거나 인사 교체를 단행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트럼프는 행정부에 대한 보호 요청을 묵살하고 러시아 수사를 오히려 확대하고 있다는 정황이 드러나자마자 코미 국장을 해고했다.6 FBI 82년 역사상 10년 임기가 끝나기 전에 국장을 해고한 사례는 그전까지 단 한 차례밖에 없었다.7 게다가 그 첫 사례는 명백한 윤리 위반에 해당했으며, 양당의 지지를 얻어 진행되었다.

물론 코미 국장의 해고는 보호해달라는 자신의 요청을 무시한 심판에 대한 유일한 공격 사례가 아니다. 트럼프는 뉴욕 남부지방 검찰청 연방검사 프릿 바라라Preet Bharara와 처음에는 개인적인 친분을 맺으려 했다.8 바라라가 지휘하는 자금 세탁 수사가 트럼프의 측근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존경받는 청렴한 검사인 바라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사를 계속 해나갔고, 결국 트럼프에게 해임을 당했다.9 법무부 장관 제프 세션스Jeff Sessions가 러시아 스캔들 수사에서 손을 떼고 난 뒤, 법무부 차관 로드 로즌스타인Rod Rosenstein이 존경받는 전 FBI 국장 로버트 뮬러를 수사를 책임질 특별 검사로 임명했을 때 트럼프는 세션스를 공개적으로 조롱하면서 그를 해임할 방법을 모색했다.10 심지어 백악관 변호사들은 뮬러의 뒷조사를 해서 명예를 떨어뜨리거나 해임 사유로 삼을만한 증거를 찾으려 했다.11 2017년 말 여러 트럼프 측근은 대통령에게 공식적으로 뮬러의 해임을 요구했고, 대통령이 조만간 결정을 내릴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독립적인 수사를 방해하기 위해 사법부를 공격한 것은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행동이었다. 예를 들어 베네수엘라 검찰총장 루이사 오르테가Luisa Ortega의 해임이 그랬다. 차베스 정권이 임명한 오르테가는 수사의 독립성을 강력하게 요구했으며, 마두로 정권에서 드러난 부패와 권력 남용에 대한 수사를 지휘했다. 오르테가의 임기는 2021년까지 보장되어 있었고, 해임은 오직 법률에 의해서만 가능했음에도(그것도 야당의 주도로), 마두로 정권이 의심스러운 절차를 밟아 구성한 헌법 제정의회는2017년 8월에 그 검찰총장을 해임했다.12

트럼프 대통령은 또한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린 판사들까지 공격했다. 제9 항소법원 제임스 로바트James Robart 판사가 트럼프 행정부의 여행 금지 명령에 반대 의견을 표명했을 때 트럼프는 이렇게 말했다. “판사라는 사람의 의견이 미국의 법 집행을 가로막았다.”13 그로부터 두 달 뒤 위의 법원이 이민자 보호도시에 연방정부의 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행정부 결정에 반대하는 판결을 내놓았을 때 백악관은 이를 “선출되지 않은 판사”가 법치주의를 공격한 것이라 비난했다.14 트럼프 또한 제9 항소법원을 해산하겠다고 협박했다.15

2017년 8월 트럼프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전 애리조나 보안관 조 아르파이오Joe Arpaio를 사면함으로써 사법부를 간접적으로 공격했다. 아르파이오는 인종차별적 수사 방식을 중단하라는 연방 법원의 명령을 어긴 것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트럼프의 반이민 정책을 지지하는 많은 이들의 정치적 동지이자 영웅이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헌법에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하는 조항은 없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미국 대통령들은 사면권을 지극히 제한적으로 행사했고, 또한 그때마다 법무부의 조언을 구했다. 자신을 보호하거나 정치 이득을 위해 사면권을 남용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과감하게도 그 규범마저 저버렸다. 그는 법무부의 자문을 구하지 않았을 뿐더러, 그 사면은 분명하게도 자신의 지지층을 결집하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다.16 트럼프의 이러한 움직임은 언젠가 측근은 물론 자기 자신까지 사면할 것이라는 사회적 우려를 낳았다.17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변호사들은 이미 그 방안을 모색 중이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사법권의 독립성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타격을 입을 것이다. 헌법학자 마틴 레디시Martin Redish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통령이 이러한 방식으로 측근들을 사면한다면 사법부는 행정부의 월권으로부터 헌법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실질적인 수단을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18

트럼프 행정부는 다음 수순으로 공직자윤리국Office of Government Ethics(OGE)에 압박을 가했다. 공직자윤리국은 독립적인 감시 기구로, 법적 수사 권한은 없지만 이전 행정부들의 존중을 받았다.19 공직자윤리국 국장 월터 쇼브Walter Shaub는 트럼프의 비즈니스 협상에서 비롯된 여러 이해관계 충돌과 관련하여 정권 인수 기간에 그를 계속해서 비난했다. 이후 트럼프 행정부는 공직자윤리국에 맞대응했다. 트럼프 측근이자 정부개혁 감독위원회 위원장 제이슨 체이피츠는 쇼브에 대한 수사 의지를 넌지시 비췄다.20 그해 5월 행정부 관료들은 백악관이 로비스트 출신 인사들을 임명한 것에 대한 수사를 당장 중단하도록 공직자윤리국을 압박했다.21 이렇게 백악관의 협박과 외압이 계속되는 가운데 결국 쇼브는 기자인 리안 리자Ryan Lizza의 표현대로 “망가진” 공직자윤리국을 뒤로하고 위원장직에서 사퇴했다.22

사법부와 정보기관을 비롯하여 여러 다른 독립적인 정부 기구에 대해 트럼프가 보여준 태도는 전형적인 전제주의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트럼프는 법무부와 FBI를 통해 힐러리 클린턴을 포함하여 여러 민주당 인사를조사할 것이라는 경고를 공공연하게 했다. 그리고 2017년 말 법무부는 실제로 힐러리를 수사하기 위해 특검까지 고려했다. 그러나 해임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는 심판을 매수하지 못했다. 그는 코미의 공석에 충성스러운 측근인사를 앉히지 못했다.23 그 주된 이유는 상원 내 주요 공화당 의원들이 반기를 들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상원 내 공화당 의원들은 또한 세션스 검찰총창의 자리를 측근으로 대체하려는 트럼프의 시도에도 반발했다. 게다가 트럼프가 치러야 할 전투는 이것만이 아니었다.24

188-191쪽

경쟁자와 반대자를 처벌하라

또한 트럼프 행정부는 상대편 주전들이 정치판에서 뛰지 못하게 막았다. 정부 비판자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언어 공격은 한 가지 사례다. 트럼프는 〈뉴욕 타임스〉와 CNN과 같은 주요 언론이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는 전제주의를 연구하는 학자에게 대단히 익숙한 행태다. 2017년 2월에 트럼프는 트위터를 통해 이러한 언론을 ‘미국 국민의 적’이라고 불렀다.25 정치 평론가들은 트럼프가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사용했던 표현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는 매우
위협적인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트위터에서 ‘미국 국민의 적’을 언급하고 며칠 후 트럼프는 보수정치활동위원회Conservative Political Action Committee에 참석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수정헌법 제1조를 사랑합니다, 그 누구보다 사랑합니다. (…) 하지만 여러분도 선거운동 기간에 목격했듯이 가짜 뉴스는 지금도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 저는 이런 뉴스가 국민의 생각을 대변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건 절대 국민의 뜻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뭔가를 시작해야 합니다.26

정확하게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다음 달 트럼프는 ‘명예훼손법을 수정하겠다’는 자신의 선거공약과 관련해서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뉴욕 타임스〉는 “언론 세상의 명예를 실추시켰다. 2년 동안 나를 못살게 굴었다. 명예훼손법을 개정해야 할 때인가?”27 한 기자가 트럼프 행정부에 개정을 진지하게고려하고 있는지 물었을 때 백악관 비서실장 라인스 프리버스Reince Priebus는 이렇게 대답했다. “방안을 모색 중에 있습니다.”28 라파엘 코레아 에콰도르 대통령 역시 똑같은 접근방식을 택했다. 그는 수백만 달러 규모의 명예훼손 소송을 벌였고, 많은 기자를 투옥했다.29 대통령의 이러한 행위는 언론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들었다. 비록 트럼프는 명예훼손법 개정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위협은 계속되고 있다. 7월에 트럼프는 과거 자신의 WWE 레슬링 영상을 살짝 편집해서 CNN 로고로 얼굴을 덮은 상대를 넘어뜨리고 마구 펀치를 날리는 모습을 리트윗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은 정부 규제 기관을 통해 비우호적인 언론 기업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2016년 선거운동 기간 중 트럼프는 독점금지법을 들먹이며 〈워싱턴포스트〉 소유주 제프 베조스를 위협했다. 그리고 이러한 트윗 메시지를 날렸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면 안타깝게도 그들은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30 다음으로 타임워너Time Warner(CNN 모기업인)와 AT&T의 임박한 합병을 막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31 트럼프 임기가 시작되고 몇 달 사이 백악관 자문들이 행정부의 독과점 규제 기관을 통해 CNN을 압박하기 위한 방안을 검토 중에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리고 2017년 10월 마침내 트럼프는 “사업 허가권을 문제 삼겠다”며 NBC를 비롯한 여러 방송사를 공격했다.

191-193쪽

비록 트럼프가 언론과 여러 정부 비판자들을 대상으로 언어 공격을 퍼붓기는 했지만, 그의 말이 (적어도 아직까지는)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기자를 구속하거나 정부 기관의 압박으로 언론사가 기사 내용을 수정하도록 하지는 않았다.

194쪽

그의 섬뜩한 위협은 아직 실현되지는 않았다. 가령 FBI를 충직한 측근 인사로 채우고, 뮬러의 수사를 중단시키는 것처럼 논란거리가 된 반민주적인 계획은 여당의 반대나 트럼프 개인의 무능력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198쪽

민주주의 운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인으로 여론을 꼽을 수 있다. 잠재적 독재자가 군사 쿠데타나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킬 수 없다면, 충성을 바칠 사람을 모으고 비판자를 처단하기 위해 또 다른 수단을 찾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론의 지지는 중요한 무기가 된다. 가령 선출된 지도자의 지지율이 70퍼센트에 육박할 때 비판자들은 여론의 흐름을 의식하고, 언론 기사는 한층 부드러워지고, 재판부는 가급적 정부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려 할 것이다.70 야당은 무조건 반대만 하다가는 고립될지 모른다는 걱정에 더욱 신중하게 움직일 것이다. 반대로 지지율이 낮을 때 언론과 여당은 비판의 수위를 높이고, 재판부 역시 대통령에게 불리한 판결을 과감히 내놓을 것이다. 그리고 충성자 집단은 와해될 것이다. 후지모리와 차베스, 에르도안 모두 여론의 지지가 높을 때 민주주의 제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203쪽

지지율이 높을수록 트럼프는 더 위험한 인물이 될 것이다. 그의 지지율은 우연한 사건과 더불어 경제 상황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2005년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부시 행정부의 어설픈 대처와 같이 행정부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사건이 벌어지면, 지지율은 크게 떨어질 것이다. 반면 안보 위협과 같은 중대 사안은 지지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민주주의를 무너뜨릴 수 있는 트럼프의 위험성에 영향을 미치는 마지막 요인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전쟁이나 대규모 테러와 같은 안보 위기는 정치 게임을 완전히 바꾸어버릴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다. 안보 위기는 언제나 국민의 지지율을 높이는 쪽으로 작용한다.74 안보가 불안할 때 국민은 행정부의 부당한 처사를 참고, 전제적인 행보를 기꺼이 인정하려 든다.75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비단 일반 국민들만이 아니다. 국가 안보가 위험에 처했다고 생각할 때 판사들 역시 대통령 편에 서려는 움직임을 보인다.76 정치학자 윌리엄 하월 William Howell은 부시 대통령에 대한 제도적 견제가 9.11 테러 직후에 종적을 감췄다고 지적했다. 이후 부시는 “자신의 생각대로 위기를 정의하고 대응했다.”77

이러한 점에서 안보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민주주의는 위협을 받는다.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지도자는 민주주의 제도에 엄청난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후지모리와 푸틴, 에르도안 모두 그렇게 했다. 정적에 의해 부당하게 포위를 당하고, 민주주의 제도에 발목이 붙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잠재적 독재자에게 안보 위기는 기회의 창이다.

204-205쪽

트럼프는 자신이 했던 거짓말에 대해 많은 대가를 치르지는 않았다. 시민들이 점차 개인의 당파적 입장을 기준으로 정보의 진실성을 판단하는 정치와 언론 환경에서, 트럼프 지지자들은 임기 1년 동안 그를 거짓말쟁이로 보지는 않았다.102 그럼에도 트럼프의 거짓말은 미국의 정치 시스템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에게는 정확한 정보에 접근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다.103 선출된 지도자의 행동에 관한 신뢰할 만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다면 미국 시민은 선거권을 올바로 행사할 수 없다. 미국 대통령이 국민에게 거짓말을 늘어놓을 때 신뢰할 만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위협받게 되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는 추락한다(당연한 사실 아니겠는가?). 국민이 선출된 지도자를 신뢰하지 않을 때 대의 민주주의 근간이 허물어진다. 그들이 선택한 지도자를 믿지 못할 때 선거제도의 가치는 사라진다.

트럼프가 언론에 대한 존경이라고 하는 기본적인 규범을 저버리면서 신뢰의 상실은 더욱 심각해졌다. 언론의 독립은 민주주의 제도를 지키는 방어막이다. 어떤 민주주의도 언론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워싱턴 이후로 모든 미국 대통령이 언론과 싸움을 벌였다. 실제로 많은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언론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미국 대통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언론을 민주주의 제도의 핵심으로 인정했고, 정치 시스템 안에서 언론이 차지하는 위상을 존중했다. 개인적으로 언론을 싫어한 대통령조차 공식 석상에서만큼은 존중과 예의로 언론을 대했다. 이러한 기본 규범은 대통령과 언론의 관계를 정의하는 다양한 불문율을 만들어냈다. 이러한 불문율 중 일부는(에어포스원에 오르기 전에 기자단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 사소한 것이지만, 다른 일부는(기자회견에 백악관 기자단 모두를 초청하는 것) 대단히 중요하다.

언론사와 기자에 대한 트럼프의 공식적인 모욕은 미국 현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것이었다. 트럼프는 언론을 “지구상에서 가장 가식적인 인간의 집단”이라며 싸잡아 매도했다.104 그리고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CNN과 같은 언론사들이 거짓말을 일삼고 ‘가짜 뉴스’를 퍼뜨린다고 줄곧 비난했다.

211-212쪽

일탈의 용인은 끔찍한 결과를 낳는다

1993년 뉴욕의 민주당 상원 의원이자 전직 사회학자였던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핸Daniel Patrick Moynihan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인물에 대처하는 인간의 능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통찰력 있는 주장을 했다.108

213쪽

트럼프 취임 후 미국 사회는 정치적 일탈을 정의하는 기준을 하향 조정했다.

214쪽

규범은 민주주의를 보호하는 연성 가드레일이다. 규범이 무너질 때 용인 가능한 정치 행동 범위는 넓어지고, 민주주의를 파멸로 몰아갈 주장과 행동이 시작된다. 예전에는 미국 정치에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행동이 이제 고려해볼만한 전술이 되고 있다. 물론 트럼프 자신이 헌법적 민주주의라는 강성 가드레일을 파괴한 것은 아니지만, 미래의 대통령이 언젠가 그러한 일을 할 가능성을높이고 있다.

21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