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은 그렇게 이용될 사건이 아니다

사법농단은 재판의 독립과 사법 정의를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자기 할 일을 다한 끝에 가까스로 드러난 사건이다.

부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고 사표를 제출한 이탄희 판사의 용기 있는 행동에서 시작돼, 법원 자체 진상 조사의 부실함을 여러 판사들이 잇달아 지적했고, 언론인들은 고발 보도를 이어갔으며,마침내 검사 수십 명이 투입돼 여러 달에 걸쳐 철저히 수사한 끝에 세상에 드러난 사건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여러 달동안 노력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법농단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도 아니고, 우리 편과 네 편의 문제도 아닌, 헌법적 가치인 법관의 독립-재판의 독립과 직결되는 중대 사건이기 때문이다.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의 중심인 법원행정처가 재판의 독립을 훼손한 ‘재판개입’,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법관의 독립을 훼손한 ‘블랙리스트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그 책임을 추궁해, 앞으로 다시는 재판의 독립-법관의 독립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것이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한 법관들, 기자들, 그리고 수사한 검사들의 뜻일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사법농단은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건인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보자.

김경수 지사에게 유죄를 선고한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의 재판장인 성창호 부장판사가 사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는 것은 사실이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는 임종헌의 지시를 받은 신광렬 당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의 지시로, 당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판사였던 성창호가 정운호 게이트와 관련된 영장 정보를 신광렬에게 유출했다고 적혀있다. (※ 물론 재판을 통해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검찰의 입장이다.)

공소장의 문장 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이로써 피고인(임종헌)은 양승태, 고영한과 공모하여, 그 직권을 남용하여 정운호 게이트 의 수사 진행 상황 및 향후 계획 등에 대한 수사정보를 실시간으로 입수하여 검찰 수사에 대응할 목적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수석부장판사 신광렬에게 영장전담 판사들을 통해 수사진행 상황 및 향후 계획 등에 대한 자료를 최대한 신속히 입수 하여 보고하도록 하는 위법·부당한 지시를 함으로써 신광렬, 성창호, 조의연 등으로 하여금 수사 정보를 수집하고, 그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여 보고하게 하는 등의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였다.”

이같이 성창호 판사가 정운호 게이트 수사 정보를 수집하고 그 결과를 보고한 일이 형사처벌 대상이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당시 영장 재판을 담당한 법관으로서 성창호 판서에게 윤리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건 전적으로 타당한 의견이다. 형사처벌과 별도로, 법원에 제출된 임종헌 공소장에 성창호의 관여 사실이 적시돼 있으니 이를 근거로 대법원이 성창호에 대한 징계심사를 해야 한다는 의견도 당연히 타당성이 있다.

그렇지만 왜 김경수 도지사와 민주당 의원들은 성창호 판사의 사법농단 관여 행위에 대해서 ‘김경수 지사에 대한 유죄 선고’가 있기 전에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는가? 왜 유죄 선고가 내려진 이후에야 마치 이제서야 깨달았다는 듯이 성창호 판사가 ‘양승태 키드’고, 성창호 판사의 판결이 ‘양승태 사단의 반격’이라고 공격하는가?

만약 성창호가 법관으로서 임무를 수행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면 김경수 지사 재판과 관계 없이 재판배제나 징계를 주장했어야 하고, 김경수 지사는 형사적으로 피고인에게 보장된 절차인 재판부 기피 신청을 했어야 한다. 법관으로서의 자격, 사법농단 관여 행위의 적절성 여부는 ‘김경수 지사에 대한 재판 결과’와 관계 없이 그 자체로 적용되어야 하는 기준이기 때문이다.

사법농단 관여 법관에 대한 책임 추궁은 여야의 문제도 아니고, 진보와 보수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 편’에 대한 재판 결과와 관계 없이 중요하고 중대한 일이다. 그런데도 자기 편인 김 지사에게 불리한 결과가 나오자 갑자기 사법농단 관여를 이유로 재판부를 공격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진영논리적 잣대로 재단하는 것이며, 오히려 사법농단이라는 중대한 헌법적 사건을 정쟁의 도구로 전락시켜 그 의미를 퇴색시키는 잘못된 행동이다.

정리해보자. 사법농단에 관여했고, 법관으로서 문제 있는 행동을 한 것이라면 형사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 징계나 재판배제가 이뤄져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타당하다. 판사직 탄핵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전적으로 사법농단 관여 행위 자체에 대한 부적절성을 놓고 판단해야 할 문제다. ‘우리 편에게 불리한 판결을 했다’는 사실이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는 침묵하다가, 불리한 결과가 나오니 사법농단 관여 사실을 언급하며 재판장을 공격하는 태도는 오히려 사법농단 사건의 의의에 먹칠을 하는 최악의 정치적 행태다.

Posted in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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