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술가(柔術家) 트래비스 스티븐스의 올림픽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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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SBS 취재파일’에도 기고했습니다.]

‘브라질’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스포츠는 역시 축구다. 그러나 종합격투기(MMA: Mixed Martial Arts) 팬이라면 다른 스포츠가 먼저 떠오를지도 모른다. 실전 최강 무술로 통하는 브라질리언 주짓수(BJJ: Brazilian Jiu jitsu)다. 요즘은 서울의 웬만한 동네엔 주짓수 체육관이 있을 정도로 일반인에게도 생소하지 않은 무술이 됐다.

주짓수는 유도에 뿌리를 둔다. 올림픽 종목인 유도는 1882년 일본의 무술가 가노 지고로가 창시했다. 가노 지고로가 직접 가르친 제자 가운데 마에다 미츠요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마에다 미츠요는 젊은 시절 미국과 유럽을 떠돌다가 브라질에 정착해 도장을 열었다. 이 도장에서 유도를 배운 카를로스 그레이시, 그리고 카를로스 그레이시에게 무술을 배운 그레이시 가문 사람들이 브라질의 이종 격투기 경기를 통해 발전시킨 무술이 브라질리언 주짓수다. (주짓수는 카를로스 그레이시의 조카인 호리온 그레이시가 미국에선 만든 UFC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뿌리는 같지만 유도와 주짓수에서 경기가 진행되는 모습은 크게 다르다. 유도가 서있는 상대방을 메치거나 넘어뜨리는 스탠딩 공방에 중점을 두는 반면, 주짓수는 바닥에 있는 상대방을 제압하는 그라운드 싸움이 핵심이다. (물론 유도에도 그라운드 싸움인 ‘굳히기 Newaza’가 있고, 주짓수 역시 상대방을 넘어뜨리는 ‘테이크다운 Takedown’을 점수로 인정한다.) 자연스럽게 유도 선수들은 상대를 넘어뜨리는 기술이 우수하고, 주짓수 선수는 그라운드 기술이 강하다.

이번 리우 올림픽 유도 경기에선 특별한 장면들이 눈에 띈다. 메치기 이후 매트 위에서 그라운드 공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심판들이 ‘그쳐’를 선언하는 타이밍이 늦어진 것이다. 예전에는 두 선수가 모두 그라운드 상태로 갔을 때 경기를 중단하고 스탠딩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도록 지시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 올림픽에서는 메치기 실패 후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굳히기 공방이 진행되도록 허용하고 있다. 화려한 그라운드 기술로 승부가 결정되는 경기도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여자 유도 대표팀의 정보경 선수와 남자 유도의 안바울 선수도 팔가로누워꺾기 기술로 한판승을 따냈다.) 주짓수 경기에서나 볼 법한 장면들이 올림픽 유도 경기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굳히기의 중요성이 늘어난 이번 올림픽, 그렇다면 유도 뿐만 아니라 주짓수까지 훈련한 선수라면 더 유리하게 경기를 이끌 수 있지 않을까? 그것도 단순히 주짓수를 잠깐 경험한 수준이 아니라 블랙벨트까지 따고 유명 선수들과 정기적으로 롤링하는 선수라면? 미국 유도 대표팀의 베테랑 트래비스 스티븐스(Travis Stevens)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스티븐스는 세계적 수준의 유도가이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2012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고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4강에 올랐다. 최근 열린 과달라하라 마스터즈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땄다.(-81kg급 세계 랭킹 5위) 올해 나이는 30살.  6살에 유도를 시작해 24년째 유도를 수련하고 있는 베테랑이다. 주짓수 블랙벨트는 2013년 11월 헨조 그레이시 체육관의 주짓수 사범이자 前 UFC 챔피언 죠르쥬 생피에르(GSP)와 크리스 와이드먼의 그래플링 코치로 유명한 존 대너허(John Danaher)에게 받았다.

스티븐스의 장점은 주짓수 기술을 유도 경기에 적극적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유도의 굳히기 기술과 주짓수의 테크닉을 구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스티븐스의 그라운드 게임에선 다른 유도 선수들과 달리 주짓수 경기에서 나오는 기술이 자주 등장한다.  스티븐슨 역시 “굳히기로 가면 다른 선수들은 (주짓수를 수련한) 나를 피하고 싶을 것”이라며 굳히기에 특별한 자신감을 나타낸다. 특히 최근 우승한 과달라하라 마스터즈 대회 하이라이트를 보면 주짓수 특유의 동작이 많이 나온다.

스티븐스의 주짓수 수련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됐다. 2012년 발 부상을 당해 메치기 훈련을 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본격적으로 주짓수 수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주짓수를 시작하기 전에는 역시 주짓수 블랙벨트를 가진 유도 선수로 유명한 브라질의 플라비오 칸토와의 경기에서 주짓수 기술에 당해 패한 적도 있다. (2010년 리스본 월드컵)

[플라비오 칸토와 주짓수에 대한 좋은 글]
“유도와 주짓수는 규칙이 다른 한가지 무술이다”(코치D 블로그)

** 스티븐스는 2015년 한국의 왕기춘 선수와 그랜드슬램 대회 결승에서 맞붙기도 했다. 끊임 없이 그라운드 공방으로 끌고 가려는 트레비스 스티븐슨과 그라운드로 가지 않으려고 스티븐슨을 뿌리치는 왕기춘 선수의 스타일이 분명하게 대조되는 경기였다.  경기에선 왕기춘 선수가 승리했다.

스티븐스에게 블랙벨트를 준 존 대나하는 얼마 전 이렇게 썼다 (5월 30일에 페이스북에 쓴 글):

“그는 내가 만난 사람 가운데 가장 열심히 운동하는 선수다. 그에게 조르쥬 생 피에르(GSP)의 트레이닝 캠프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즉각적으로 이에 응했고 결국 가장 훌륭하고 소중한 훈련 파트너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보스턴에서 출발해서 4시간을 운전해 (미국과 캐나다 사이) 국경을 넘어 왔고 매트 위에 가장 먼저 도착해서 가장 마지막에 퇴장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후에 그는 또 곧바로 보스턴으로 돌아가서 위대한 지미 페드로의 저녁 유도 수업을 받았다. (중략) 내가 트래비스 스티븐스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주짓수) 수업에 매우 집중했고 수업이 끝난 후 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존, 나에게 유도를 위한 주짓수를 가르치진 말아 주세요 – 그냥 내게 주짓수를 가르쳐 주세요.” 그는 이 새로운 스포츠를 배우기 시작했고 곧 아주 우수한 수준으로 뛰어 올랐다. 이제 그는 두 종목을 멋지게 결합하고 있다. 이번 주말에 벌어진 마스터즈 경기에서 그는 시상대 제일 위에 서기 위해서 타치와자(스탠딩 테크닉)와 네와자(그라운드 테크닉)을 다이나믹하게 결합한 기술을 이용했다.”

유도의 원형인 고류 유술의 목적은 일어서 있든 바닥에 누워있든 구분하지 않고 상대를 완벽하게 제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스포츠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유도와 주짓수는 서로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지만, 스포츠 선수로서의 좋은 성적 뿐만 아니라 무술가로서의 탁월함을 추구하는 트래비스 스티븐스 같은 사람들 덕분에 원형에 가까운 유술의 강력함을  목격할 수 있게 됐다.

아무래도 미디어는 올림픽 기간 내내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트래비스 스티븐스 같이 흥미로운 무술가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올림픽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이 될 것이다.

유술가(柔術家) 트래비스 스티븐스의 올림픽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