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심 사건과 공판 중심 보도의 문제점

조국-정경심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에 대한 보도가 한창 이어질 때 저널리즘 전문가를 자처하는 여러 사람이 ‘공판중심보도’가 중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다. 모 공영방송사 간부는 취임 일성으로 ‘공판중심보도’를 내세우기도 했다. ‘공판중심주의’를 흉내 낸 성의 없는 개념어처럼 보이긴 했지만, 검찰 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뤄졌던 공판 과정에 대한 보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이후 조국-정경심 관련 재판에 대해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공판 기사가 많이 보도됐다. ‘공판중심보도’를 여러 사람이 강조한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검찰이나 변호인 측이 통상적 공판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드라마를 법정에서 자주 보여주며 기사거리를 제공하기도 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정경심 공판은 유튜버들이 몰리는 이벤트이기도 했다. 정경심 교수가 출석하고 퇴장할 때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서관 출입구 앞에 유튜버 여럿이 몰려들어 라이브 방송을 했다. 거의 매번 공판에 참석해 재판 내용을 성실하게 왜곡하는 유튜버들도 있었다. 이런 유튜버 방송을 정경심 측이 재판부에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유튜버 방송에 나온 증인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어떤 유튜버는 정경심 측에 불리한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정경심 공판은 레거시 미디어 소속 기자들이나 시사 유튜버들이나 모두 주목하는 ‘공판중심보도’의 한마당이었다.

하지만 1심 재판이 끝난 이 시점에서 돌아볼 때 정경심 재판에 대한 ‘공판중심보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성과도 있다. 어떤 기자들은 공판이 있을 때마다 공판에서 오간 이야기를 성실하게 기록해 인터넷 기사로 올리기도 했다. 검찰 수사 단계에서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정보가 공개되고, 피고인의 반론권도 훨씬 많이 보장되는 공판 단계의 보도이기 때문에 정보의 양이나 균형성 면에서는 수사 단계만 집중 보도했던 과거에 비해 나아진 점이 있다. 그러나 ‘뉴스소비자들에게 공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의 기준, 또는 판단을 위한 적절한 정보를 제공했는가’라는 기준에서 볼 때 정경심 사건에 대한 공판중심보도가 제 역할을 했는지는 따져볼 점이 적지 않다.

‘공판중심보도는 검찰과 피고인 측의 이야기를 균형있게 보도하는 것’이라는 얼핏 보기에는 맞는 말 같지만 실제로는 적절하지 않은 도그마 탓에 기자들이 팩트에 대한 가치판단에 소극적이 됐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기사들이 공판에서 나온 검찰의 주요 워딩 50%, 피고인 측의 주요 워딩 50%를 공평하게 정리하는 것에 머물렀다.

이 같은 현상은 판결이 보도된 이후의 현상과 비교해보면 더욱 도드라진다. 정경심 교수의 딸이 경북 영주의 동양대에서 봉사활동을 했다고 주장하는 시기에 서울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는 보도가 판결 선고 후 여러 건 나왔다. 그런데 이는 이미 공판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다. 공판을 방청했덩 기자들은 검찰이 이런 증거를 제시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팩트에 대해 정상적 가치 판단을 하는 기자라면 적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경심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하는 기사를 써야 했다. 하지만 그런 대담한 기사를 쓴 기자들은 많지 않았다. (이런 증거가 공판 과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보도한 기자들은 있었다.)

차명계좌도 마찬가지다. 정경심 교수의 동생이 검찰 조사에서는 누나의 돈을 받아서 누나의 지시를 받아 주식을 매매한 것이라고 인정했다가 법정에서 진술을 뒤집었다는 사실, 해당 계좌에서 이뤄진 일부 거래의 경우 계좌 명의자는 한국에 있던 시점에 해외에서 증권사 거래시스템에 접속해 매매한 기록이 있다는 사실 역시 공판에서 이미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차명계좌와 관련해서 정경심이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를 쓴 용감한 기자들은 많지 않았다. 정경심 교수의 지시로 영문도 모른 채 국가보조금을 받았다가 그대로 정 교수에게 돌렸줬다는 조교의 증언도 공판 과정에서 나왔던 말이지만, 이 같이 명백한 증언 앞에서도 정경심의 거짓말을 팩트체크’한 기자들은 별로 없었다.

이해는 가는 일이다. 검찰과 정경심 측 워딩을 5:5로 쓰지 않고, 증인신문 내용 중 검찰 측에 유리한 증언을 제목으로 뽑아서 기사를 쓴 기자는 적지 않은 비난을 받았다. 지금의 법원 취재 현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선배 언론인등은 ‘기자들이 검찰이 증인신문 할 때는 열심히 재판을 취재하다가 변호인의 반대 신문이 시작되면 우루루 빠져나간다.’라는모 유튜버의 주장을 근거로 후배 기자들을 다그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법정에서 직접 보고 들은 사실이 명백하다고 해도 ‘최소한 일부 대목에서는 정경심이 거짓말한 것이 명백해 보인다.’라고 팩트체크를 할 수 있었던 기자는 많지 않았다.

조금 다른 결의 이야기지만, 검찰 수사 단계를 취재하는 기자와 공판 단계를 취재하는 기자는 똑같은 법조팀 소속이라도 취재의 목적, 취재 방식, 보도의 효과까지 완전히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기자들이 잊고 있는 점이기도 하지만 검찰 수사 단계에 대한 취재와 보도는 팩트파인딩의 일환이다. 의혹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국가기관 또는 수사기관이 어떤 수사를 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미국 언론인들이 쓴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이란 책에서 수사기관에 대한 취재가 탐사보도의 한 형식으로 – 물론 매우 주의해야 할 유형의 취재 방식으로 – 언급돼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정농단 사건을 촉발시킨 TV조선이나 JTBC 등 각 언론사 취재를 법조팀의 검찰 취재 기자들 또는 검찰 취재를 하다가 차출된 기자들이 주도했고, 이들의 취재 내용이 검찰 수사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외국에서도 중요한 사건이 있으면 검찰 수사 내용을 기자들이 열심히 취재한다. 트럼프 관련 뉴욕남부지검 수사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국 기자들이 열심히 취재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처럼 검찰 보도의 양이 많지 않고, 검찰을 중심으로 한 취재가 상대적으로 덜한 것은 검찰의 사회적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작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간 거의 모든 전직 대통령 또는 대통령의 직계가족이 검찰의 수사를 받은 나라는 우리나라말고는 찾기 어렵다. 이것이 검찰의 책임인지, 아니면 검찰을 둘러싼 구조의 문제인지, 아니면 정치적 이슈를 형사고발로 습관적으로 끌고 가는 정치권의 문제인지에 대해서는 논문 한 편을 써도 모자랄만한 주제이니 여기서 더 이야기하진 않겠다.)

반면 공판 단계에 대한 보도는 공개적으로 표출된 팩트를 잘 정리하고, 진정한 의미를 정확히 해석해, 뉴스 소비자에게 사안에 대해 판단할 기준을 제공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정경심 사건을 둘러싼 공판중심보도의 한계는 뚜렷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정보를 전달했지만, 당사자인 조교가 돈을 그대로 돌려줬다고 증언하는데도 국가보조금을 가로챈 적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로 보인다고 지적하기 쉽지 않았다면 과연 이런 보도가 뉴스 소비자의 판단에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오히려 일부 유튜버들은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을 소비자들에게 제공하긴 했다. 사실을 왜곡해 전달한 것이 문제였지만… 이들은 경쟁적으로 공판 내용을 성실하게 왜곡해서 전달했고, 결국 판결이 선고된 이후에는 많은 사람이 판결 내용을 전혀 인정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간 일부 시사 유튜버들을 통해 접했던 공판의 내용과 판결의 내용이 너무 달라서 인지부조화가 올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공판에서 검찰이 매번 깨졌는데 어떻게 징역 4년이 나올 수 있냐며, 재판부를 탄핵하자고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고, 재판부 법관들을 직권남용 혐의로 고발하는 상황에 대해서는 ‘공판중심보도’를 했다는 나를 포함한 레거시 미디어 기자들도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판단의 기준을 아예 제시하지 않는 레거시 미디어 기자와 판단의 기준을 나름대로 제시하는 시사 유튜버 사이에 어떤 것이 더욱 뉴스 소비자에게 유용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을지는 자명하다. (오해가 있을까봐 이야기하지만 모든 유튜버가 사실을 왜곡한 것은 아니다.)

지금 이야기되는 이른바 ‘공판중심보도의 원칙’의 또 하나의 문제는 굉장히 기회주의적이라는 것이다. 다른 재판, 한 쪽 편을 기자가 마음 놓고 비판하더라도 누구도 시비를 걸지 않는 재판을 보도할 때는 검사와 피고인의 말을 5:5로 또는 균형있게 보도해야 한다는 원칙 같은 건 여전히 전혀 지켜지지 않는다. 오히려 피고인 측의 어처구니 없는 언행을 ‘야마’로 잡는 보도가 여전히 많다. 나는 이런 원칙 자체가 현실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설사 이런 원칙에 일정한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고 다분히 기회주의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공판에 대한 취재와 보도의 강화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공판 과정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기자의 가치판단을 배제하고 양 쪽의 이야기를 공평하게 정리하는 보도라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기자의 가치판단은 필요하다. 가치판단 과정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결과에 대해 뉴스 소비자에게 판단을 받으면 된다. 욕먹고 음해를 당하면 맞서 싸워야 한다. 가치판단을 미루고 제목과 보도 분량을 정확히 5:5로 맞추는 기사가 대부분이 된다면 뉴스 소비자에게 공적인 사안에 대한 판단의 기준을 제공한다는 목적은 달성될 수 없다. 왜곡된 방식으로 판단의 기준을 전달하는 사람들 때문에 벌어지는 ‘인포데믹’을 사실상 방치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른바 ‘원칙’이 기회주의적으로 적용되는 것도 문제다.

공판을 보도하는 기자들은 지금보다 용감해져야 한다. 정경심 교수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된 이후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인지부조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