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소장·대법원장에게 “각별한 관심” 부탁한 문재인 대통령

5부 요인 간담회 모두발언을 하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 / 2020년 12월 22일

오늘은(2020년 12월 22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신청한 정직 처분 집행정지 사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 재판부가 심문하는 날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하필이면 이날 오전 대법원장과 헌법재판소장을 포함한 5부 요인을 청와대에 초청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간담회 안건은 ‘코로나 극복 방안’이라고 했다. 이를 두고 윤석열 총장에 대한 법원의 심문이 있는 날 대법원장을 만나서 대법원과 별로 관계도 없어 보이는 ‘코로나 극복 방안’을 논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런 비판에 대해서 나는 애초에는 판단을 유보했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만나는 일정이 윤석열 총장의 집행정지 신청 사건에 대한 심문 기일이 확정되기 이전에 잡혔을 가능성이 있으며 (사실 확인을 안 해봄), 하필이면 오늘 만나는 것이 의심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공식적 논의 안건은 윤석열 총장 징계 관련 재판과 관계 없는 ‘코로나 극복 방안’이라고 발표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전에 5부 요인 간담회가 열린 뒤 공개된 문재인 대통령의 모두 발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문재인 대통령이 ‘코로나 극복’에 대한 메시지와 함께 ‘권력기관 개혁’에 대해서도 언급했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기관 개혁 문제로 여러 가지 갈등들이 많다.”라면서 “그 점에 대해서도 헌법기관장님들께서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라고 요청한 것은 매우 문제적이었다.

오늘 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헌법기관장” 중에는 유남석 헌법재판소장도 있었다. 유남석 헌재소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하는 “권력기관 개혁” 의 대표 사례로 평가되는 공수처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재판부의 재판장이다. 이 사건은 지난 5월 유남석 소장을 포함한 전원 재판부에 회부된 이후 여전히 심리가 진행 중이다. 이를 문재인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모를 수 없다. 그런데도 문재인 대통령은 “권력기관 개혁으로 (인한) 여러 가지 갈등” 중 대표적 사례인 공수처에 대한 헌법소원 재판을 하고 있는 재판장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주시기를 바란다.”라고 공개적으로 주문한 것이다. 게다가 헌재는 역시 “권력기관 개혁 문제로 인한 갈등”으로 해석되는 윤석열 총장 징계와 관련한 검사징계법 헌법소원 사건도 심리 중인데 말이다.

만약 지난 정부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손해배상 재판을 대법원 진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을 만나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로 여러 가지 갈등들이 많다”라면서”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가상의 상황이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재판에 부적절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시도라거나 재판의 독립성을 훼손하는 부적절한 행위라고 평가받아야 한다면, 문재인 대통령이 유남석 헌재소장에게 한 말 역시 똑같은 평가를 받아야 하지 않나?

문재인 대통령이 “권력기관 개혁”에 대해 언급한 순간 이 자리에 김명수 대법원장이 참석한 것 역시 논란이 될 수밖에 없다. 윤석열 총장에 대한 징계를 둘러싼 갈등 역시 “권력기관 개혁 문제로 (인한) 여러 가지 갈등” 중 하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윤석열 총장이 신청한 집행정지 사건에 대해 법원이 심문하는 날, 그리고 여권 핵심 인사들이 권력기관 개혁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기소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 정경심 교수에 대한 판결 선고일 전날, 문재인 대통령이 김명수 대법원장을 만나 “권력기관 개혁 문제로 (인한) 여러 가지 갈등”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요청한 것을 적절한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을까? 설마 대통령이 대법원장에게 이런 발언을 한다는 것이 어떻게 해석될지 전혀 몰랐다고 시치미를 뗄 것인가? 이날 모임에는 현직 판사직에서 청와대 비서관으로 사실상 직행한 김영식 청와대 법무비서관도 배석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내로남불은 정치에서 당연한 것이니, 이를 기준으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붕괴를 원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핑계에 불과하다.’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내로남불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인간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평가 기준이 일관적이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도덕률 때문이다. 모든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자리잡고 있고, 대부분의 사람은 유치원에서부터 익히는 그런 도덕률이다.

특히 기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이상 ‘내로남불’을 당연히 여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응원단장 노릇에 열중하면서 알량한 이익을 기대하거나, 문재인 대통령의 팬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에 관심이 더 많거나, 본인의 비뚤어진 정의관념이 기자로서의 직업윤리나 공정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모리배에게 ‘내로남불’은 삶의 법칙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