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색스 ‘내 자신의 삶’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의 저자 올리버 색스 박사가 8월 30일(미국 동부 시간) 세상을 떠났다. 향년 82세. 연합뉴스는 저명한 신경학자이자 뛰어난 작가였던 색스 박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뇌의 신비 탐험한 ‘의학계의 시인’ 올리버 색스 별세(종합2보)

나는 의학과 관련된 색스 박사의 글을 읽은 적이 없다. 그러나 색스 박사가 암 전이를 진단받은 직후 2015년 2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에세이는 감명 깊게 읽었다. 나 역시 (먼 훗날) 죽음 앞에서 이렇게 간명하고 담담한 글을 남길 수 있으면 좋겠다. 사는 게 힘들 때 읽으면 좋은 글이다.  필요할 때 편하게 읽을 수 있게 번역해 블로그에 남긴다. 늘 그렇듯 오역과 의역이 태반이니 정확한 의미가 궁금하면 원문을 참조하시길 바란다.

“내 자신의 삶(My Own Life)” 올리버 색스 [영어 원문 링크]

1달 전까지 나는 건강상태가 훌륭하다고, 심지어 탄탄하다고 생각했다. 81살이었지만 나는 하루에 1마일씩 수영했다. 그러나 내 운은 거기까지였다. – 몇 주 전 간에 다발성 전이가 있음을 알게됐다. 9년 전 눈에서 안구흑생종이라는 희귀한 종양이 발견됐다.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방사선 치료와 레이저 시술을 받고나니 그쪽 눈은 결국 안 보이게 됐다. 안구흑생종의 전이 확률이 50% 정도지만, 내 경우는 특성상 (전이될) 가능성이 더욱 낮았다. 나는 운이 없었다.

첫 진단 이후 9년 동안 좋은 건강과  높은 생산성을 누린 것에 감사한다. 하지만 이제 나는 죽어가는 것과 대면하고 있다. 암덩어리는 간의 1/3을 차지하고 있고 진행이 느리긴 하지만 이런 암의 진행 과정은 막을 수 없다.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살지 선택하는 것은  내 몫이다. 나는 가능한 가장 풍성하고, 깊이 있고, 생산적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이점에 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철학자 가운데 한 명의 말이 도움이 된다. 65살에 죽을 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된 데이비드 흄은 1776년 8월, 단 하루만에 짧은 자서전을 썼다. 그는 이것에 “내 자신의 삶 (My Own Life)”라는 제목을 붙였다.

“나는 이제 신속한 사라짐에 대해 고찰한다.” 그는 썼다. “질병 때문에 느끼는 고통은 거의 없다. 더 이상한 점은 육신의 커다란 쇠퇴에도 불구하고, 내 영혼은 찰나의 감퇴도 겪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연구에 대한 열정과 동료들 사이에서의 유쾌함을 전과 같은 정도로 유지하고 있다.”

나는 80살 넘게 살 정도로 충분히 운이 좋았고, 그리고 흄이 숨진 나이인 65살 이후의 15년도 (그전과) 똑같이 일과 사랑을 모두 풍부하게 즐겼다. 이 기간 책을 5권 출판했고 올봄에 출판 예정인 자서전을 한 권 완성했다.(흄의 자서전보다 몇 페이지 더 길다.) 거의 끝마쳐가는 다른 책도 몇 권 더 있다.

흄은 덧붙였다. “나는 온화한 기질이고, 화를 잘 참고, 개방적이고, 사교적이고, 흥겨운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사람이 애착을 가질지만 적대감을 갖기는 어렵고, 내 안의 모든 열정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이다.”

이점에서 나는 흄과 다르다. 사랑하는 부부관계와 친구관계를 향유했고, 누구와도 심각한 원한을 지지 않았지만 온화한 기질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나를 아는 사람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나는 폭력적인 열광을 동반한 격정적 기질의 인간이고, 내 안의 열정을 극단적으로 조율하지 못했다.

그리고 흄의 에세이 중 이 문장은 진실이기 때문에 특히 더 큰 충격을 줬다. 그는 썼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에서 더 이상 분리되기는 어렵다.”

지난 며칠동안, 나는 아주 높은 고도에서 내 인생을 일종의 풍경처럼 살펴볼 수 있었고, 인생 모든 부분의 연결을 깊숙이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내가 인생과 끝을 봤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나는 아주 강렬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남아있는 시간 우정이 깊어지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할 수 있기를, 글을 더 쓸 수 있기를, 그리고 체력이 허락할 경우 여행을 할 수 있기를, 새로운 경지의 인식과 통찰력을 갖게 되길 희구하고 희망한다.

이 세상에 남길 기록을 바로잡는데는 대담함과 명증함 그리고 평이한 말하기가 포함될 것이다. 그러나 즐거움을 위한 시간도 약간 있을 것이다.(심지어 어리석음을 위한 시간 역시 약간 있을 것이다.)

나에게 갑자기 명확한 초점과 관점이 생겼다. 본질적이지 않은 어떤 것에 소비할 시간이 내겐 없다. 나 자신과 나의 일 그리고 내 친구들에게 집중해야만 한다. “뉴스아워”를 매일 밤 시청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정치나 지구온난화 논쟁에 주의를 기울이는 일도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라 분리다. – 나는 여전히 중동과 지구온난화, 그리고 늘어나는 불평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더 이상 내 문제가 아니다. 미래에 속한 것이다. 나는 재능있는 젊은 사람을 만나면 기쁘다 – 내 암 전이를 검사하고 진단한 사람을 만날 때조차 말이다. 나는 미래가 좋은 이들에게 맡겨져 있다고 느낀다.

지난 10년 가량 나는 동시대인들의 죽음을 점점 의식해왔다. 우리 세대는 떠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 각각의 죽음을 나의 일부가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갑작스런 중단으로 느껴왔다.

우리가 떠나고나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와 똑같은 사람이 존재했던 적은 원래 없었다.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들은 채울 수 없는 구멍을 남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존재는 남과 다른 개인이 되고, 스스로의 길을 찾고, 스스로의 인생을 살고, 스스로의 죽음을 찾는 운명이기 – 유전적이자 신경계통적인 운명 – 때문이다.

전혀 겁을 먹지 않은 체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배적 감정은 감사함이다.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았다. 나는 많은 것을 받았고 일부를 돌려줬다. 나는 읽었고, 여행했고, 생각했고, 썼다. 나는 세상과 교류했고, 작가 그리고 독자들과 특별한 교류를 했다.

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있는 존재,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그리고 그 자체가 어마어마한 특권이자 모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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